관세 협상 후속 조치…정부-재계 국내 투자 공동 노력 약속
SK 600조·현대차 125조 등 대규모 투자 계획 발표
이 대통령 "위험 투자 손실도 재정이 감수"…지원 확대 시사
[포인트데일리 박일한 기자]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되면서 재계의 대미 투자 확대는 기정사실이 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압박을 피하기 위해 한국 기업들이 미국 현지 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국내 투자가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번지고 있었다.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민관 합동회의는 이 우려에 대한 재계의 공식 답변이자, 정부의 지원 의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7개 그룹 총수들은 합산 수백조원에 달하는 국내 투자 계획을 쏟아냈고, 이재명 대통령은 규제 철폐와 위험 투자 지원이라는 두 가지 카드로 화답했다.
◇ 왜 지금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나
이번 회의는 단순한 투자 발표회가 아니다.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직후 열린 '후속 조치' 성격의 자리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 7개 그룹 최고 경영자가 대통령과 한 테이블에 앉는 일은 흔치 않다. 배경에는 미국 시장을 둘러싼 새로운 통상 환경이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상호관세를 무기로 한국 기업에 미국 내 투자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재계로서는 대미 투자 확대가 불가피하다. 문제는 기업의 투자 재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에 돈을 쏟으면 국내 투자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자연스럽다. 이 대통령이 "비슷한 조건이라면 되도록 국내 투자에 지금보다 좀 더 마음 써 달라"고 당부한 이유다.
![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 대통령, 최태원 SK그룹 회장. 뒷줄 오른쪽부터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구광모 LG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김용범 정책실장. [연합뉴스]](https://cdn.pointdaily.co.kr/news/photo/202511/280119_273099_1434.jpg)
◇ 600조원의 무게…SK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총수들이 발표한 투자 계획 중 가장 눈에 띄는 숫자는 SK그룹의 600조원이다. 최태원 회장은 "원래 2028년까지 128조원의 국내 투자를 계획했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반도체 메모리 수요 증가와 공정 첨단화로 투자비가 늘어나면서 "대충 추산컨대 용인만으로도 600조원 정도의 투자가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600조원이라는 수치는 파격적이다. 이는 SK하이닉스가 추진 중인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비용을 포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반도체 팹(fab·생산시설) 하나를 짓는 데 통상 20조원 이상이 소요되는 점을 감안하면, 수십 개의 팹을 순차적으로 건설한다는 장기 청사진이다. 최 회장은 "반도체 공장 하나씩 오픈할 때마다 2000명 이상씩 추가 고용이 늘고 있다"며 "2029년까지는 연간 1만4000명에서 2만명 사이의 고용 효과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도체가 단순히 수출 효자 품목을 넘어 국내 고용의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신호다.
◇ 삼성·현대차·LG…각사 전략의 차이
다른 그룹들의 투자 계획도 적지 않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국내에서 연간 25조원 규모인 125조원의 투자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발표한 116조원에서 8조2000억원을 증액한 수치다. 세부적으로는 기존 모빌리티 강화에 39조원, 소프트웨어정의차량(SDV)·AI·반도체·수소 등 미래 사업에 50조원을 배정했다. "금년 7200명 채용에 이어 내년에는 1만명 채용을 목표로 한다"는 발언도 나왔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향후 5년간 예정된 100조원의 국내 투자 중 60%를 소재 부품 장비에 대한 기술 개발과 확장에 투입하겠다"고 했다. 60조원을 소부장(소재·부품·장비)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LG는 전지, 디스플레이 등 부품 사업 비중이 높은 만큼 협력사와의 동반 성장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구 회장은 "미국도 제조업 기반을 복원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국내 산업 생태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구체적인 투자 금액보다 고용에 방점을 찍었다. "향후 5년간 매년 6만명씩 국내에서 고용하겠다"는 약속이다. 지역 균형 발전과 관련해서는 "삼성이 짓는 AI 데이터센터는 수도권 이외 지역에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대미 투자 확대로 국내 투자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이 회장은 "그런 일이 없도록 국내 투자 확대, 청년의 좋은 일자리 창출, 중소기업·벤처기업과의 상생에 더더욱 노력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 조선·바이오도 가세…대미 투자와의 선순환 강조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향후 5년간 약 15조원 규모의 국내 투자를 계획 중"이라며 에너지·로봇 분야에 8조원 이상, 조선해양 분야에 7조원을 배정했다. 정 회장은 "미국 조선업 재건 사업은 새로운 사업 기회를 포착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대미 투자와 국내 투자의 상호 보완성을 강조했다. 미국에서 사업을 확장하면서도 국내 조선 생태계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논리다.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은 "국내 조선·방산 분야에서만 향후 5년간 약 1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한화는 미국 필리 조선소에 50억달러(약 7조원 이상)를 투자하지만, 이것이 국내 생산 기반 이전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여 부회장은 "필리 조선소에 발주한 선박의 경우 선박 가격의 약 40%가 국내에서 공급된다"며 미국 사업이 국내 기자재 기업의 수출을 늘리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국내 송도, 충북 오창, 충남 예산에 3년간 4조원을 시설 투자한다"고 했다. 미국에는 2조원을 투자하지만 국내 투자 규모가 더 크다는 점을 부각했다. R&D 비용도 현재 연 6000억원에서 내년부터 8000억원으로 늘리고, 수년 내 1조원을 넘길 계획이다.
◇ 정부의 화답…규제 철폐와 위험 투자 지원
재계가 투자 계획을 내놓은 만큼 정부의 지원책도 구체화될 전망이다. 이 대통령은 "여러분이 제일 필요한 게 규제 같다"며 "규제 완화, 해제, 철폐 중 가능한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면 신속하게 정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기업 현장에서 체감하는 규제 장벽을 청와대가 직접 해결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위험 투자에 대한 새로운 지원 방식이다. 이 대통령은 "우리 재정이 후순위 채권 발행을 인수한다든지, 손실을 선순위로 감수하는 등의 새로운 방식도 얼마든지 도입할 수 있다"고 했다. 쉽게 말해 기업이 R&D나 신사업에 투자할 때 정부 재정이 먼저 손실을 떠안겠다는 것이다. 벤처캐피털이나 정책금융에서 쓰이는 '손실 선순위(first-loss)' 구조를 대기업 투자에도 적용하겠다는 발상이다. 이는 기업의 모험적 투자를 유도하려는 의도지만, 실제 집행 시 재정 부담과 형평성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노사 관계에 대한 언급도 나왔다. 이 대통령은 "상호 보완적이고 상생적인 요소가 언제부터인가 너무 적대화되고 있다"며 사회적 대토론과 대타협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기업 투자를 늘리려면 노동 유연성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재계의 숙원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 약속이 현실이 되려면
수백조원의 투자 계획이 실제로 이행되려면 몇 가지 변수를 넘어야 한다. 우선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주력 산업의 글로벌 수요가 뒷받침돼야 한다. 투자 규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시장 상황이 악화되면 계획은 조정될 수밖에 없다. 최태원 회장도 "반도체 메모리 수요 증가"를 600조원 투자의 전제 조건으로 언급했다.
정부의 규제 철폐도 말처럼 쉽지 않다. 환경, 노동, 안전 관련 규제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단시간 내 해결하기 어렵다. 이 대통령이 "신속하게 정리하겠다"고 했지만, 국회 입법 과정과 부처 간 조율이 필요한 사안들이다.
무엇보다 대미 투자와 국내 투자 사이의 균형이 지속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추가 압박을 가하거나, 미국 내 인센티브가 강화되면 기업들이 국내 투자를 줄이고 미국으로 자원을 재배치할 유인이 커진다. 총수들이 "국내 투자 위축은 없다"고 다짐했지만, 시장 상황과 정책 환경이 변하면 경영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날 회의는 의미가 있다. 정부와 재계가 한자리에서 국내 투자 의지를 공개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다. 말로만 끝나지 않도록 정부는 약속한 규제 철폐를 실행해야 하고, 재계는 발표한 투자를 실제로 집행해야 한다. 관세 협상 타결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양측 모두 인식하고 있다면, 이번 약속이 공염불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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