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역질서 대전환② 미중 기술냉전 격돌
반도체법 가드레일과 화웨이·AI 제재까지 전방위 확전
중국의 굴기 vs 미국의 봉쇄
시장과 동맹 사이, 한국 기업의 딜레마 강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90여 년 만에 미국 평균 관세율이 20%를 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축된 자유무역 질서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제 무역전쟁은 단순한 관세 분쟁이 아닙니다. 기술 표준부터 탄소국경세, 핵심 광물 공급망, 데이터 주권, 금융 결제망까지 모든 영역이 지정학적 무기로 활용되는 '총체적 지경학(Geoeconomics) 시대'가 열렸습니다. 세계 10위 무역대국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효율성과 안보 사이에서, 시장과 동맹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본지는 창간 기획 '자유무역의 종언-쪼개진 세상에서 한국의 생존전략' 10회 연재를 통해 변화하는 글로벌 무역 질서를 진단하고, 한국의 생존전략을 모색합니다.

[포인트데일리 권상희 기자] "강대국간 지정학 경쟁에서 기술이 무기화되는 기술경쟁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차정미 국회미래연구원 국제전략연구센터장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설명한 국제관계의 현실이다. 과거 냉전이 핵무기와 군사력으로 대변됐다면, 21세기 신냉전의 전장은 인공지능(AI), 바이오 등 첨단기술로 옮겨갔다는 이유에서다. 반도체가 총알이 되고, 데이터가 영토가 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트럼프 2기 정부 출범과 함께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관세전쟁이라는 경제적 충돌에서 시작된 양국 갈등은 이제 첨단기술 분야의 전면적 대결로 진화했다. 더 이상 단순한 무역분쟁이 아니라,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둘러싼 문명사적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이런 기술냉전 한복판에서 전례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기존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9년 5월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나는 모습. 사진=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9년 5월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나는 모습. 사진=AP 연합뉴스

◇기술이 무기가 된 시대, 냉전의 새로운 정의= 차정미 센터장은 '미중 기술냉전: 트럼프 2기 미중 기술외교경쟁 전망과 한국 과학기술외교에의 제언' 보고서에서 "냉전의 시작을 식별하는 기준은 지정학적 사고의 급증인데, 오늘날 이는 군사경쟁이 아닌 인공지능과 양자, 바이오 등 첨단기술분야에서 두드러진다"고 진단했다.  

실제 미국은 핵심 첨단산업 분야에서 중국을 대상으로 관세 부과와 수출 통제 등 고강도 규제를 이어가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7년 화웨이와 ZTE 제재를 시작으로 트럼프 1기 미중 무역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양국은 강도 높은 수출통제와 제한, 제재 등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이 수출통제와 기업 제재 등의 조치를 발표하면, 중국도 바로 이어 광물 수출 통제, 신뢰할 수 없는 기업 명단 공개, 빅테크 기업에 대한 반독점 조사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 결과 글로벌 기술 생태계는 두 개의 진영으로 분화되고 있다. 미국 중심의 '자유진영 기술블록'과 중국 중심의 '권위주의 기술블록'이 각각의 표준과 공급망을 구축하며 경쟁하는 구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신화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신화 연합뉴스

◇반도체, 기술냉전의 최전선= 기술냉전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지는 단연 반도체 분야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차단하기 위해 다층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2023년 발표한 반도체법 관련 '가드레일'은 미 정부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이 10년간 중국 등 '우려국가'에서 생산역량 확장을 제한하는 조항을 담았다. 

주목할 점은 트럼프 정부가 지난달 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에서 제외한 조치다. 이는 한국 기업들이 중국 내 공장에서 미국산 반도체 제조 장비를 사용할 때도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전략을 동맹국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전략에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현 트럼프의 산업 정책은 미국 기업들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 지속 가능성이 낮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산업 공급망은 변수가 많아 미국의 통제가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 수출 통제가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기술 자립을 도왔다는 의견도 있을 정도다.

그레고리 앨런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 고문은 보고서를 통해 "미국의 수출 통제와 중국의 기술 발전 속도에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미국이 중국으로 첨단장비 수출을 통제한다고 반드시 중국의 기술 발전이 뒤쳐지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2010년부터 2025년 2월까지 미중 양국의 수출통제 조치. 자료=국회미래연구원
2010년부터 2025년 2월까지 미중 양국의 수출통제 조치. 자료=국회미래연구원

◇예측불가능한 트럼프, 혼란 가중시키는 정책 변화= 기술냉전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불가능성이다. 지난해 11월 미 대선 직후 블룸버그는 "도널드 트럼프의 외교정책은 예측불가능할 것으로 예측된다"는 제목의 전망 기사를 내놓았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하루가 다르게 말을 뒤집고 정책을 변경하면서, 미중 관계는 물론 글로벌 산업계를 지속적으로 긴장하게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관세 정책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중국과의 전면적 관세전쟁을 예고했다. 올해 4월 중국산 제품 관세를 최대 145%까지 올리겠다고 선언했고, 중국도 125%로 맞불을 놨다. 두 나라의 관세전쟁은 두 나라와 모두 경제적으로 밀접히 연결돼 있는 우리나라와 같은 처지 국가들을 긴장시켰다. 5월 제네바 회담을 통해 각각 30%, 10%의 관세만 유지하기로 합의하고, 지난달 최종 관세 부과 결정 시점을 90일 더 연장하며 휴전을 선언한 상태지만, 전세계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다. 

미국과 중국이 기술냉전을 벌이는 상태에서 상대국에 대한 모호한 태도는 사업 불확실성을 높인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이 고율 관세로 중국을 압박했지만, 현재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조치가 굉장히 유효하게 작동해 미국이 대체 핵심광물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일단 휴전 선언을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이런 트럼프의 전략은 오히려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경기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상회담 중인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AP 연합뉴스
정상회담 중인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AP 연합뉴스

◇'안미경중' 시대의 종말, 한국의 전략적 선택= 한국에게 기술냉전은 생존의 문제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미중 갈등의 직격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부과를 넘어서서 더 적극적인 대미 투자 확대와 일자리 공급을 요구하면서 선택의 여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최근 발언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안미경중 시대는 끝났다"며 "최근 자유 진영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 재편이 본격화되면서 한국도 미국의 기본적인 정책에 어긋나게 행동하기 어렵다"고 선언한 것이다.

민정훈 국립외교원 교수는 상황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에는 한국이 중국 시장에서 얻는 이득이 컸지만 지금은 중국이 기술 경쟁자가 된 상황이라 '경제는 중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악화됐다. 여전히 중국은 중요한 무역 파트너지만, 경제·통상에서 한국이 중국 편을 들어주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한국은 어떤 전략을 택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적 현실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동헌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과의 협력이 일방적 요구가 아니라 한국 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틀 안에서 지속 가능해야 한다"며 "중국과도 동맹의 틀 속에서 관리 가능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 선택"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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