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역질서 대전환① WTO 체제의 붕괴
무너진 자유무역...'법의 지배'에서 '힘의 지배'로
수출 의존도 44% 한국 경제...생존 위기
중국, 베트남, 인도 등 무역 급감...공급망 붕괴 현실화
지역화 시대 시장 다각화 필수..."새 국가 전략 모색해야"
1930년대 대공황 이후 90여 년 만에 미국 평균 관세율이 20%를 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축된 자유무역 질서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무역전쟁은 단순한 관세 분쟁이 아닙니다. 기술 표준부터 탄소국경세, 핵심 광물 공급망, 데이터 주권, 금융 결제망까지 모든 영역이 지정학적 무기로 활용되는 '총체적 지경학(Geoeconomics) 시대'가 열렸습니다. 세계 10위 무역대국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효율성과 안보 사이에서, 시장과 동맹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본지는 창간 기획 '자유무역의 종언-쪼개진 세상에서 한국의 생존전략' 10회 연재를 통해 변화하는 글로벌 무역 질서를 진단하고, 한국의 생존전략을 모색합니다.
[포인트데일리 박일한 기자] "우리는 이제 '트럼프 라운드'를 목도하고 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USTR)가 지난달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던진 이 한 마디는 80년간 지속된 자유무역 질서의 종언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1944년)와 우루과이 라운드(1995년)로 구축된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주의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200일 만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WTO체제 종언과 미국 해방의 날= WTO가 힘을 잃은 건 2019년 12월 트럼프 1기 행정부부터다. 미국이 "WTO가 중국 편을 든다"며 상소기구 위원 선임을 거부한 순간 WTO체제는 급격히 위축됐다.
WTO 상소기구는 자유무역 관련 분쟁해결의 최종심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위원 3명 중 2명의 임기가 만료되면서 최소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고 무역 분쟁을 겪는 국가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무역 분쟁 피해국이 WTO에 항소하는 행위는 '공허로의 항소(appeal into the void)'로 통했다. 상소해 봤자 판정이 무기한 정지되는 상황이 6년간 지속됐다. 올해 미국이 WTO 예산분담금까지 보류하면서 자유무역 분쟁해결 시스템 복원은 더 멀어졌다.
WTO 기능이 마비되면서 국제무역은 더이상 '법의 지배'를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국제 무역 환경은 이제 '힘의 지배'만 남았다. 그리어 대표는 "우리는 글로벌 질서를 다시 만들었다(We remade the global order)”고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4월 2일을 '미국 해방의 날'로 불렀다. 전 세계를 겨냥해 무차별한 상호관세를 발표한 날을 미국은 '해방'이라 칭했다. 미국은 이날 전 세계 거의 모든 수입품에 10~20% 기본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최고 145%까지 높은 관세를 적용하겠다고 했다.
당장 같은 달 5일부터 국가별로 기본 10% 관세를 부과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9일부터15% 추가 관세를 부과해 총 25%의 상호관세를 적용했다. 한국과 미국이 맺은 FTA(자유무역협정)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미국이 스스로 정한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추진된 이 조치는 미국 내에서도 법적 논란을 일으켰다. 연방항소법원이 "대통령이 권한을 넘어섰다"며 위헌 판단을 내렸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무시했다.
웬디 커틀러 전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는 "지난 수십 년간 국제 무역을 지탱해 온 규칙들이 완전히 뒤집혔다"고 말했다.
◇글로벌 공급망의 대지진= 트럼프 라운드의 충격파는 즉각 글로벌 공급망을 강타했다. WTO는 2025년 세계 상품교역 전망을 2.7% 성장에서 -0.2% 위축으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국가별로 수출은 큰 타격을 받았다. 급증하던 베트남의 해외 수출 실적은 빠르게 위축됐다. 올 상반기 베트남의 철강 수출량은 전년 동기 대비 13% 감소했고, 수출액은 22.5%나 줄었다.
미국에 수출하려면 50% 관세를 내야 하는 인도는 반미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인도 수출 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 심리가 위축됐다. 올해 인도 민간기업 설비 투자가 전년 대비 25% 급감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역시 50% 관세를 통보받은 브라질은 미국을 WTO에 제소했지만, 상소기구가 없는 지금 실효성은 크지 않다. 브라질은 미국으로 수출하던 커피 수출을 사실상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유럽이나 아시아로 판매처 다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유럽 철강 업계는 미국의 25~50% 관세에 “산업적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자원의 무기화도 진행됐다. 미국으로부터 통상 규제를 받던 중국은 갈륨·게르마늄(2023년) 및 흑연(2023~2024년)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반도체·배터리 공급망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중 첨단 반도체·장비 수출통제는 한국·대만 반도체 기업들에 커다른 피해를 안겼다.
수출 비중이 높은 자동차, 반도체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기는 등 대응하고 있다. 예를들어 대만 TSMC, 우리나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기업들은 각각 미국 내 수조원 규모 반도체 공장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 공장 운영은 자국이나 다른 저임금 국가보다 생산비가 20% 이상 급증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베인앤컴퍼니는 "기업들이 비용 효율성보다 정치적 위험 회피를 우선시하며 생산 전략을 전면 재편하고 있다"고 현 상황을 설명했다.

◇한국의 고통...수출 강국 직격탄= 수출이 GDP의 44%를 차지하는 한국에게 트럼프 라운드는 치명타가 됐다. 미국은 한국의 2번째 수출 시장(전체 수출의 18%, 1315억 달러)으로 관세 부과의 영향이 즉각 나타났다.
먼저 한국 자동차 수출의 핵심인 현대차와 기아는 25% 관세 부과 후 미국 판매가 급감했다. 올 2분기 영업이익이 총 1조 6000억 원 감소하는 직접적인 손실을 겪었다. 이승조 현대자동차 재경본부장 부사장은 "하반기는 상반기보다 더 많은 (미국 관세 부과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대차 울산 공장은 수출물량 감소에 따라 지난 8월까지 올들어 6번째 휴업에 들어갔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타격이 컸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가 2022년 10월 시작된 후 2023·2024년 계속 강화되면서, 한국의 중국향 반도체 수출은 빠르게 위축됐다.
미국의 50% 철강 관세 조치로 포스코의 대미 수출액은 7월 기준 전년 동기대비 20% 이상 급감했다 2021년 3월 이후 4년 4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포항 공장 일부 라인을 중단해야했다.
한국 정부는 7월 31일 미국과 '울며 겨자 먹기' 협상을 타결했다.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3500억 달러(한국 GDP의 20%)에 달하는 미국 투자를 약속했다.
한국 정부는 "더 높은 관세를 피하기 위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투자 약속의 핵심은 전기차 배터리와 반도체 분야다. 현대차는 조지아에 대규모 EV 공장을, 삼성전자는 텍사스에 추가 반도체 팹을 건설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순탄하지 않다. 현대차 조지아 공장에서 한국인 기술자 300여 명이 이민 단속에 걸려 구금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숙련된 한국 기술 인력 없이는 공장 가동이 어려운데, 비자 문제로 차질을 빚는 어이없는 사태까지 생긴 것이다.

◇세계의 분열...BRICS vs 서방= 트럼프 라운드는 국제사회의 분열을 가속화하고 있다. 중국·인도·브라질이 50% '관세 폭탄'을 맞으면서 BRICS 중심의 반미 연합이 결속을 다지고 있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은 미국의 관세를 '관세 갈취(tariff blackmail)'라고 규탄했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브라질 룰라 대통령과 함께 미국의 일방적인 관세 문제를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중국은 125% 맞불 관세로 대응하는 한편, 희토류 수출 제한을 통해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양국은 90일간 초고율 관세를 유예하는 '관세 휴전'에 합의했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요원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관세도 나쁘지만, 착각에 빠진 대통령은 더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EU의 6000억 달러 투자 약속을 '황제의 새 옷'에 비유하며 "이는 무역 합의가 아니라 벌거벗은 황제의 새 옷"이라고 꼬집었다.
또다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 교수는 "미국 없는 글로벌 자유무역을 구상해야 할 때"라며 "APEC과 같은 열린 지역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시했다.
IMF는 관세 충격으로 세계 GDP가 장기적으로 0.2%에서 최대 7%까지 손실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는 미국의 2025년 관세 정책이 글로벌 성장을 1~2% 줄이고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급한 시장 다각화= 한국은 미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업그레이드된 '중국-아세안 FTA 3.0'을 통해 베트남·인도 경로를 강화하고, EU와는 '그린테크 무관세 지역' 조성을 논의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는 "트럼프 라운드에서 살아남으려면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80년간 지속된 자유무역 질서의 종언은 단순히 미 트럼프 행정부의 일시적인 정책 변화 효과가 아니다. 향후 10년 이상 이어질 자국 우선주의라는 새로운 시대로 전환을 의미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 교수가 말했듯 이제는 '미국 없는 글로벌 자유무역을 구상해야 할 때'다. 80년 자유무역 질서의 종언 앞에서 한국의 새로운 생존법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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