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억 손실 막으려 미국에 3500억 투자?"...미 경제학자 분석 화제
"동맹국 국민에 쇠사슬 채우는 나라에 투자할 필요없다" 분노 확산
지정학적 현실 간과한 '칠판 경제학'의 한계
합의 거부하면 25% 관세가 끝? 더 가혹한 보복 기다릴 수도
경제-안보 연계된 신냉전 시대, 순수 경제논리로 해결 불가

[포인트데일리 박일한 기자]  미국 싱크탱크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선임경제학자 딘 베이커의 "한국이 트럼프에게 3500억 달러 줄 돈으로 자국 수출기업을 지원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지난 11일 CEPR 홈페이지에 "한국과 일본이 미국과 큰 틀에서 타결한 무역 합의가 좋은 합의가 아닌 것 같다"고 평가하며 이런 주장을 펼쳤다.

이 주장은 국내 여러 언론에 소개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최근 조지아주에서 일어난 한국인 구금 사태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고도 범죄자 취급을 당한 데 대한 분노가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사에는 "1000% 공감한다 그 돈으로 수출업자 지원하면서 장기적으로 다른 나라로 수출 늘리는 정책을 펴라", "동맹국 노동자에게 쇠사슬 채우는 날강도 미국, 용서 못한다" 같은 댓글이 수백 개씩 달리고 있다.

미국 트럼프 관세 정책 사진=연합뉴스
미국 트럼프 관세 정책 사진=연합뉴스

◇"125억 달러 손실 막으려 3500억 달러? 비합리적"= 베이커는 미국이 한국산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할 경우 한국의 대미 수출 손실을 연간 125억 달러로 추산했다. 지난해 한국이 미국에 수출한 1320억 달러를 기준으로 15% 관세와 25% 관세를 각각 적용할 때 예상되는 수출 감소분 등을 추산한 결과다.

이는 한국 GDP의 0.7%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는 "125억 달러 손실을 막으려고 3500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며 "그 돈의 20분의 1만 써서 피해 기업과 노동자를 직접 지원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베이커는 더 근본적인 의문도 제기한다.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다. 트럼프는 어떤 합의에도 얽매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년이나 내후년, 아니면 그 이후에도 다시 더 많은 돈을 요구할 수 있다. 그의 사업 파트너들이 뼈저리게 배웠듯, 도널드 트럼프에게 합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썼다. 신뢰할 수 없는 합의에 천문학적인 돈을 쓰는 건 잘못이라는 것이다.

자유무역협정(FTA) 등 기존 합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터무니없이 높은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수백조원의 투자를 요구하는 미국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한 한국인들이 들으면 너무나 공감될 수밖에 없는 말이다.

베이커의 주장은 순수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다. 관세로 인한 직접적 피해액보다 28배나 많은 돈을 투자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불합리하다. 문제는 비경제적 위험과 기회비용 문제를 간과한 주장이라는 점이다. 현실의 복잡성을 무시한 '칠판 경제학'의 전형이다.

◇미국의 추가 보복 가능성= 베이커의 주장은 미국이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 기반한다. 한국이 수백조원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미국은 어떻게 나올까.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합의를 수용하거나 관세를 내거나(accept the deal or pay the tariff)"라는 명확한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고율 관세만 문제일까? 미국은 25% 관세를 넘어 더 가혹한 보복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 자동차 등 핵심 수출품목에 대한 추가 제재나 최혜국 대우 철회 등이 현실화될 수 있다.

외교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한국의 투자금액은 당장 경제적 실익 차원이 아니라 훨씬 더 큰 경제적·외교적 파국을 막기 위한 위험 회피 비용"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은 특히 미국과 방위비 분담금, 주한미군 주둔 비용 등을 논의해야 한다. 미국은 동맹국에 대중국 견제 전략 등을 위한 국방비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 역시 한국과 유사한 상황이다. 일본은 15% 관세율을 얻기 위해 5500억 달러 투자를 약속했고, 일본 내에서는 '불평등조약'이라는 비판이 거세지만 다른 선택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미·중 신냉전' 구도에서 동맹국들은 미국의 '보호 비용'을 경제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새로운 현실을 맞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미 투자 합의는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사안이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과 안보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 깔려 있다. 한국은 경제와 안보를 분리할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딘 베이커의 주장은 한국의 이런 지정학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순수한 경제적 논리로만 접근한 한계를 갖는다.

◇현실성 없는 주장에 끌리는 이유= 정부가 미국 투자 대신 수출기업을 지원한다고 하면 현실적인 난관도 생길 수밖에 없다. 특정 기업 지원은 '재벌 특혜', '퍼주기'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고, 수출하지 않는 내수기업에 대한 지원 요구도 봇물을 이룰 것이다. 과거 정부의 대기업 지원 정책들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점을 감안하면, 이 정도 규모의 지원책은 국내 정치적 합의를 도출하기 극히 어렵다.

그럼에도 베이커의 주장이 국내에서 호응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지아주 한국인 구금 사태로 반미 감정이 고조된 상황에서, '미국에 굴복하지 말고 우리 힘으로 해결하자'는 메시지가 감정적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명심해야 할 건 감정과 현실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베이커의 주장은 단순한 비용-편익 분석을 넘어서는 현실의 복잡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한국은 미국과의 경제 관계가 흔들리면 안보 관계까지 영향받을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경제와 안보를 분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순수 경제 논리만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물론 대미 투자 합의가 완벽한 선택지는 아니다. 불투명한 조건과 막대한 규모는 분명한 부담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성 없는 대안에 매달릴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철하게 국익을 계산하는 것이다. 베이커의 주장처럼 '간단한 해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지정학적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재 한국이 직면한 것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미·중 신냉전 시대 중견국의 생존 전략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한 실용적 해법이다.

저작권자 © 포인트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