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역질서 대전환⑦ AI·데이터 규범전쟁
GDPR·AI act로 빅테크로부터 데이터 유출 막는 EU
'자국 우선' 중국, 美 H20도 포기하고 반도체 키운다
韓, 구글과 지도두고 '기싸움'...전문가 "주권 보호 사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90여 년 만에 미국 평균 관세율이 20%를 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축된 자유무역 질서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제 무역전쟁은 단순한 관세 분쟁이 아닙니다. 기술 표준부터 탄소국경세, 핵심 광물 공급망, 데이터 주권, 금융 결제망까지 모든 영역이 지정학적 무기로 활용되는 '총체적 지경학(Geoeconomics) 시대'가 열렸습니다. 세계 10위 무역대국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효율성과 안보 사이에서, 시장과 동맹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본지는 창간 기획 '자유무역의 종언-쪼개진 세상에서 한국의 생존전략' 10회 연재를 통해 변화하는 글로벌 무역 질서를 진단하고, 한국의 생존전략을 모색합니다.

[포인트데일리 이준 기자] 메타(페이스북 모회사)가 EU 사용자 데이터를 무단으로 미국에 전송했다는 이유로 12억 유로(약 1조9000억원)라는 역대 최대 개인정보 보호법(GDPR)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이는 국가들이 자국 데이터를 지키기 위해 글로벌 빅테크를 상대로 벌이는 '데이터 철옹성' 구축 전쟁의 상징이다.

아마존은 2021년 7억4600만 유로, 구글은 쿠키 동의 절차 위반으로 1억5000만 유로, 틱톡은 미성년자 데이터 부적절 처리로 3억4500만 유로의 과징금을 각각 내라고 요구받았다. 올 1월까지 누적된 GDPR 과징금은 총 58억8000만 유로에 달한다.

엔비디아 로고와 중국 국기.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엔비디아 로고와 중국 국기.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중국에서는 더욱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중국 사이버공간관리위원회가 바이트댄스(틱톡 모회사), 알리바바 등 자국 주요 기업들에게 엔비디아의 AI 칩 구매를 금지했다. 표면적 이유는 '개인정보 유출 우려'였지만, 실제로는 자국 AI 칩 산업 보호가 목적이다. 중국 관영 매체는 알리바바 자회사의 AI 칩이 엔비디아 H20과 유사한 성능을 내면서도 부품원가는 40% 저렴하다고 보도했다.

한국의 구글 지도 반출 분쟁도 마찬가지다. 2016년부터 계속된 이 갈등에서 구글은 한국 내 고정밀 지도를 해외 데이터센터로 이전해야 원활한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북한과 휴전 상태인 특수성을 들어 군사 안보를 이유로 거부했다.

◇삼파전으로 나뉜 데이터 규범 경쟁= 이런 데이터 전쟁의 배경은 제2차 대전 후 구축된 자유무역 질서가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석유를 선점한 국가가 세계를 지배했듯, 이제는 데이터를 축적하고 AI 기술을 선점하는 국가가 미래 패권을 쥘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현재 세계는 세 블록으로 나뉘어 규범 경쟁을 벌이고 있다. EU는 '인권'과 '가치'를 무기로 GDPR의 역외 적용을 통해 강력한 규제 파급력을 발휘한다. 2024년 유럽의회를 통과한 'AI법'으로 위험도 기반 AI 시스템 분류와 금지 규정도 도입했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는 2024년 8월 발표한 '유럽연합 AI법의 주요내용 및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EU 내 법인이나 사무소를 두고 있지 않은 기업도 EU에서 이용될 경우 법의 적용을 받는다"며 "규제의 효과, 분쟁 양상을 면밀하게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미국은 주별로 파편화된 규제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연방 차원의 포괄적 개인정보보호법(ADPPA, APRA) 제정 시도가 있었지만 2022년과 2024년 모두 의회 통과에 실패했다. 대신 캘리포니아주 CCPA/CPRA(2020년 시행, 2023년 강화), 버지니아주 VCDPA(2023년), 콜로라도주 CPA(2023년), 코네티컷주 CTDPA(2023년), 유타주 UCPA(2023년) 등 20개 주가 각자의 개인정보보호법을 시행하고 있다. 이는 '규제 차익거래'(서로 다른 규제 환경 간의 차이를 이용해 이익을 얻는 전략)를 통해 혁신을 도모하는 미국 특유의 특성 때문으로 평가된다. 미국은 이런 방식으로 혁신하는 자국 기업의 시장 지배력이 곧 글로벌 표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국가 안보'와 '통제'를 최우선으로 사이버보안법, 데이터보안법, 개인정보보호법 등을 통해 데이터를 국가 전략 자산으로 간주한다. 중국 내 수집 데이터는 중국 내 서버 저장이 의무이며, 민감 데이터의 해외 전송은 정부 승인이 필요하다.

◇통하지 않는 실리콘밸리 성공공식= 이는 '빠르게 움직이고 기존 것을 파괴하라'는 실리콘밸리식 성공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규제 환경 이해와 준수 역량이 기업 생존의 핵심 경쟁력이 됐다는 뜻이다.

디지털 세계 파편화가 가속화되면서 단일 글로벌 데이터 규범 마련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다자간 협력보다 '데이터 무역 블록' 출현 가능성에 주목한다. 미국-EU 간 데이터 흐름 협정이나 동아시아 지역 내 데이터 협력 프레임워크가 새 질서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 터너 구글 대외협력 정책 지식 및 정보 부사장이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구글
크리스 터너 구글 대외협력 정책 지식 및 정보 부사장이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구글

전문가들은 한국 같은 중견국이 이런 새로운 블록 형성에서 중요한 가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각 진영의 철학을 이해하고 중재함으로써 새로운 질서 형성을 주도할 수 있다는 기대다.  

글로벌 기업들은 파편화된 규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데이터 현지화가 가장 대표적이다. 마이크로소프트, IBM, 아마존 등이 각국 데이터 현지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전 세계 데이터 센터를 구축하고 있다.

기업들은 또 자체 AI 윤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7년 AI 윤리 위원회를 설립했고, IBM도 책임 있는 AI 개발 원칙을 수립했다. 규제 준수를 새로운 사업 기회로 전환하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IBM은 컴플라이언스(법규준수, 준법감시, 내부통제 등) 플랫폼을 구축해 규제 전문성을 상품화하고 있다.

◇한국 "하이브리드 모델 필요"= 네이버, 카카오 등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 미국·유럽 기준을 충족하면서도 국내 규제를 준수해야 하는 이중고에 직면해 있다. 

이성래 한국인공지능협회 수석팀장은 "무조건적인 데이터 폐쇄는 기업 혁신을 억제한다"면서도 "정부 대응은 국가가 핵심 데이터 자산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일정 조건 하에 해외 전송을 허용하는 하이브리드 모델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재성 중앙대 AI학과 교수는 구글 지도 분쟁에 대해 "휴전 국가인 우리나라 특성상 지도 반출은 국가 안보와 연결돼 있다"며 "정부 선택은 데이터 주권을 보호한 사례"라고 주장했다.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사진=오픈AI 챗GPT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사진=오픈AI 챗GPT

◇'규제 환경에 맞춘 비즈니스 모델' 개발해야= 'AI·데이터 규범전쟁'은 21세기 지정학을 재편하는 핵심 갈등이다. EU의 인권 중심, 미국의 시장 중심, 중국의 국가 통제 모델이 양립할 수 없는 가치 충돌을 일으키며 세계를 파편화된 디지털 지형으로 만들고 있다.

기업들은 지역별로 규제 환경에 맞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하고, 현지화된 인프라 구축과 규제 준수 전문성을 핵심 역량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데이터 주권을 국가 안보의 필수 조건으로 인식하고 균형있는 규제안을 마련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AI와 데이터 규범 경쟁이 앞으로 더욱 격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 '대전환'의 승자는 AI와 데이터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도 복잡한 지정학적 규범 전쟁을 현명하게 헤쳐나가는 국가와 기업이 될 것으로 본다. 

이성래 팀장은 "한국의 목표(AI 3대 강국)를 범용 인공지능(AGI) 개발 국가라는 더 큰 비전으로 재정의할 때 한국의 전략적 스탠스는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글로벌 데이터 경쟁 속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AGI 개발에 필수적인 데이터 흐름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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