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역질서 대전환⑤프렌드쇼어링의 덫
세계는 지금 효율성보다는 지정학적 거리로 공급망 재편중
조지아 공장 사태 등 예상치 못한 기업 피해 잇따라
미국 공장 건설비 급증·인력난...스윙 스테이트만 떼돈?
"원천기술확보, 다극, 다변화 모색 절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90여 년 만에 미국 평균 관세율이 20%를 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축된 자유무역 질서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제 무역전쟁은 단순한 관세 분쟁이 아닙니다. 기술 표준부터 탄소국경세, 핵심 광물 공급망, 데이터 주권, 금융 결제망까지 모든 영역이 지정학적 무기로 활용되는 '총체적 지경학(Geoeconomics) 시대'가 열렸습니다. 세계 10위 무역대국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효율성과 안보 사이에서, 시장과 동맹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본지는 창간 기획 '자유무역의 종언-쪼개진 세상에서 한국의 생존전략' 10회 연재를 통해 변화하는 글로벌 무역 질서를 진단하고, 한국의 생존전략을 모색합니다.
[포인트데일리 박일한 기자] 지난 4일 오전 미국 조지아주 브라이언 카운티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캠퍼스. 6조3000억 원을 투입한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 헬리콥터가 떴다. 군용 차량 수십 대가 공장을 에워쌌고, 무장한 미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이 마치 "전쟁터인 것처럼" 들이닥쳤다.
"범인을 체포하러 온 줄 알았는데 갑자기 우리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한 한국인 근로자가 BBC에 증언한 당시 상황이다. "헬리콥터와 드론, 장갑차, 그리고 총을 든 사람들이 있었다. 일부 경찰이 노동자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 총에서 나오는 빨간 레이저를 보고 충격을 받아 두려움에 떨었다."
건물 밖으로 쫓겨난 한국인들은 요원들의 지시에 따라 일렬로 늘어서야 했다. "발목에 족쇄가 채워지고 허리에도 수갑과 연결된 족쇄를 채웠다." 체인과 케이블타이로 양발과 양손이 묶인 채 버스에 태워진 한국인들은 300명이 넘었다.
![미국 이민 단속 당국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영상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연합뉴스]](https://cdn.pointdaily.co.kr/news/photo/202509/270666_262827_472.jpg)
이들은 한국에서 수십 년간 축적한 전기차와 배터리 제조 노하우를 미국에 교육하기 위해 파견된 핵심 인력이었다. 하지만 미국 이민당국은 "단기 출장용 비자로 장기간 노동을 할 수 없다"며 이들을 범죄자 취급했다.
미국 정부가 관세를 무기로 한국 기업에 무리한 투자를 요구하면서도 그에 필요한 핵심 기술 인력 유입을 제약하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공장 준공 일은 예정보다 최소 2~3개월 지연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일을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한다. 겉으로 우호국 간 협력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막대한 비용과 예상치 못한 장벽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동맹의 덫'에 빠졌다는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새로운 룰= 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경제를 지배해온 공식은 단순했다. '가장 저렴한 곳에서 생산하고, 가장 빠른 경로로 운송하라.'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미·중 기술패권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이 공식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가까운 거리, 싼 지역을 상대로 한 무역보다 동맹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지리적 거리보다는 '지정학적 거리'가 무역의 새로운 기준이 현상, 이른바 '프렌드쇼어링'이 본격화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주창한 그 프렌드쇼어링의 현실화다. 실제 맥킨지글로벌연구소(MGI)의 올리비아 화이트 디렉터는 최근 서울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서 "글로벌 무역망은 탈세계화가 아니라 재편되고 있다"며 "정치·외교적으로 가까운 국가 간 교역과 투자가 강화되고 있다"며 프렌드쇼어링 현상을 강조했다.
프렌드쇼어링의 제도적 플랫폼으로 등장한 것이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다.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 견제를 위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경제적 리더십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구상한 일종의 '경제 나토'다.
하지만 IPEF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기존 자유무역협정(FTA)과는 달리 관세 인하와 같은 시장 접근성 확대 조치를 포함하지 않는다. 참여국들은 미국 시장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 없이, '공동의 가치'를 명분으로 미국 중심의 경제 블록에 편입돼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프렌드쇼어링은 결국 세계시장에서 미국의 주력 산업이 타격을 받지 않도록 공급선을 다변화하고자 하는 목적을 띠고 있다"며 " 경제적 측면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득실을 따져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은 사실 많은 리스크를 안고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도 텍사스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 '반도체과학법(CHIPS Act)'에 따라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5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고 있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일단 건설비가 많이 올랐다. 로이터통신은 당초 170억 달러로 예상되었던 건설 비용이 47%나 급증해 250억 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보도했다. 텍사스 지역 만성적인 물 부족은 막대한 용수를 필요로 하는 반도체 공장 운영에 치명적 제약이 되고 있다. 주민들은 '파운드리 설립 반대 단체'까지 결성하며 반발하는 것도 어려움을 키웠다.
숙련 인력 확보도 난항이다. 미국 정부의 일자리 창출 목표와는 달리, 고숙련 기술 인력 부족으로 공장 완공 목표가 2025년에서 2026년으로 연기됐다.

◇'글로벌 스윙 스테이트'의 부상= 한국 기업들이 고전하는 사이, 이른바 '글로벌 스윙 스테이트(Global Swing States)' 국가들은 지정학적 균열을 기회로 활용하는 정교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글로벌 스윙 스테이트는 브라질, 인도, 터키 같은 나라처럼 특정 강대국(미국, 중국 등) 진영에 속하지 않고, 경제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국가들을 의미한다.
인도가 대표적이다. 러시아산 원유를 할인된 가격으로 수입해 정제한 후 서방 시장에 되파는 방식으로 막대한 차익을 얻고 있다. 올해 6~7월까지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량은 일일 평균 140만160만 배럴에 달했다.
베트남은 '대나무 외교'로 미국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맺으면서도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올해 8월까지 261억달러의 외국인직접투자를 유치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UAE는 러시아 제재 우회의 세계적 허브로 부상했다. 2021년 1.3톤에 불과했던 러시아산 금 수입량이 지난해 96.4톤으로 급증했다. 지난해 비석유 부문 무역액은 8160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동맹 비용을 현명하게 관리해야=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 경제는 프렌드쇼어링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 강력한 안보 동맹을 맺고 있어 외교적 선택의 폭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안보 의존도가 높을 수록 경제적 자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지난 수십 년간 당연하게 여겨왔던 자유무역의 혜택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미국 중심의 프렌드쇼어링이 대체하는 상황이지만,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프렌드쇼어링 과정에서 생기는 사고와 손실을 그저 '불가피한 손실'로 여기고 수동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시장 다변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KOTRA 지역통상조사실 이수영 팀장은 최근 열린 통상환경 대응 설명회에서 “미국의 관세 부과로 촉발된 세계 통상환경은 리쇼어링(생산기지 자국 이전), 니어쇼어링(인접국 이전), 프렌드쇼어링(우방국가 분산) 등 공급망 재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보다 유연하고 능동적인 다축, 다변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