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문가 전유물이 아니다"···삼성이 바꾸는 일상
'전통 제조업' 이미지 벗고 AI 드리븐 컴퍼니로 진화
TSMC·SK하이닉스와 정면 승부···삼성의 반격 시작
AI 반도체–플랫폼–로봇·바이오까지···빅테크 모델

[포인트데일리 윤은식 기자] "1980~90년대 반도체, 2000년대 스마트폰. 이번엔 인공지능(AI)이다."

삼성이 다시 한 번 판을 흔들고 있다. 단순한 체질 개선이 아닌 사업구조·제품·기업 문화까지 'AI 중심'으로 갈아엎는 대전환이다. 반도체 신화로 세계를 장악했던 삼성은 AI로 두 번째 신화를 준비한다. 삼성의 키워드는 'AI 퍼스트(AI First)’다. 스마트폰·TV·가전에 기능을 덧붙이는 수준을 넘어, 그룹 전체의 사업 구조와 경영 방식을 AI 중심으로 다시 짜겠다는 구상이다. 전통 제조업 이미지를 벗고 'AI 드리븐 컴퍼니(AI Driven Company)'로 변신하는 과정이 본격화됐다.

AI. 사진=게티이미지뱅크
AI. 사진=게티이미지뱅크

◇HBM, 반격의 시작 = AI 반도체의 심장은 그래픽처리장치(GPU)지만 성능을 끌어올리는 건 메모리다. 이 분야에서 삼성전자는 SK하이닉스에 밀려 '2등'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하이닉스는 고대역폭 메모리(HBM)인 HBM3·3E에서 엔비디아의 주력 공급사로 자리 잡았고, 엔비디아의 HBM3 공급을 하이닉스가 사실상 독점하면서 삼성은 존재감을 잃은 게 사실이다.

삼성이 다시 고개를 든 건 최근이다. 12단 HBM3E가 엔비디아 인증을 통과하면서 반격의 첫발을 뗐다. 업계에서는 "이제 다시 해볼 만하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러나 본 게임은 지금부터다. 다음 목표는 HBM4다. HBM4는 속도와 대역폭을 크게 끌어올려야 하지만 발열·수율·적층이라는 '3중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데, 최근 엔비디아의 퀄테스트에서 'PVR(Product Validation Review)' 단계를 통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PVR은 반도체 신제품 개발 프러세스 중 하나인데 반도체 제품에 수율, 발열 등 문제가 없는지 검증하는 절차다.

업계에서는 HBM4가 본격 양산되는 시점을 2026년 하반기~2027년 초로 본다. 엔비디아는 내년 말부터 HBM4 탑재 차세대 GPU 양산을 준비하고, AMD·인텔도 비슷한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전망되기 떄문이다. 삼성 입장에서는 이 타이밍에 제품을 내놓지 못하면, 주요 고객의 채택 기회를 통째로 놓칠 수 있다. 반대로 제때 안정적인 수율과 성능을 확보한다면, SK하이닉스를 제치고 공급 판도를 뒤집을 수 있다.

따라서 '2026년 상반기'는 삼성이 글로벌 AI 반도체 공급망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리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삼성의 투자는 미국으로도 향한다. 텍사스 테일러에 짓는 첨단 패키징 라인은 단순한 생산시설이 아니다. 메모리와 패키징을 한 번에 묶어 고객사에 공급할 수 있는 '풀 세트 공장'이다. 이 공장은 연방정부의 칩스법 보조금 최대 47억5000만 달러와 텍사스 주정부 지원금 2억5000만 달러를 확보했다. 총 민간투자는 450억 달러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에서는 "삼성이 메모리와 패키징을 동시에 아우르며 AI 반도체 공급망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메모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삼성은 2나노 파운드리에서 대만 TSMC를 거세게 추격 중이다. 2나노 파운드리는 초미세 공정 기술을 사용해 칩을 위탁 생산하는 반도체 산업이다. 삼성은 올해 하반기부터 2나노 공정 양산에 착수하고, 내년에는 성능 강화판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삼성은 백사이트 파워 딜리버리(BSPD), 3D 적층 설계 같은 신기술도 내세운다. 하지만 시장의 시선은 수율에 쏠린다. 글로벌 고객이 "삼성 2나노를 믿고 쓸 만하다"는 신뢰를 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삼성이 노리는 시장은 HBM만이 아니다. 차세대 기술인 컴퓨트 익스프레스 링크(CXL) 메모리도 준비 중이다. GPU와 HBM 속도가 빨라져도, 초대형 데이터센터는 결국 확장에 한계가 있다. CXL은 여러 메모리를 하나로 묶어 자유롭게 나눠 쓰게 해, AI 추론이나 검색 서비스에 유리하다. 삼성은 CXL 제품을 내세워 'HBM 다음 시장'을 열겠다는 계획이다.

삼성의 AI 전략은 인프라에만 머물지 않는다. 갤럭시 AI로 소비자 접점을 넓히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올해 플래그십 스마트폰에 처음 탑재한 뒤, 2025년 말까지 4억대 기기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이는 단일 제품군이 아닌 스마트폰·태블릿·노트북 등 전 디바이스 생태계로 확장되는 전략이다. 구글의 제미나이(Gemini), 마이크로소프트 코파일럿(Copilot) 등 글로벌 파트너의 AI 플랫폼과도 긴밀히 연동해 단순히 기능을 얹는 차원이 아니라, 기기와 서비스 전반을 하나로 묶어 쓰는 '생태계 경험'을 만들겠다는 얘기다.

운영체제 차원의 변화도 눈에 띈다. 올해 공개된 개인 맞춤형 AI에 특화된 사용자 인터페이스(UI) 'One UI 8'에는 삼성의 AI 청사진이 녹아 있다. 사진 속 피사체와 배경을 자동 분리해 편집하거나, 영상의 잡음을 제거한다. 회의 녹음을 텍스트로 바꾸고 요약해주기도 한다. 텍스트·음성·이미지를 동시에 인식하는 멀티모달 AI도 들어가, 번역과 검색의 장벽을 낮췄다.

삼성이 강조하는 메시지는 "AI는 더 이상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반도체와 서버처럼 기업·전문 영역에서 AI 전략을 펼쳤지만, 이제는 스마트폰·가전 등 소비자 일상 속 기기까지 AI를 확장하고 있다. 

단순히 공급망을 장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용자가 체감할 수 있는 서비스와 경험을 혁신하겠다는 구상이다. 삼성은 산업 생태계 지배력과 개인 생활의 변화라는 두 축을 동시에 잡아 'AI 대전환'을 완성하겠다는 '빅피처'를 그리는 중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창립 이후 CDMO 사업을 위해 세계 최대 규모의 생산시설을 확보했다. 사진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직원이 4공장 배양기를 점검하고 있는 모습. 사진=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창립 이후 CDMO 사업을 위해 세계 최대 규모의 생산시설을 확보했다. 사진은 삼성바이오로직스 직원이 4공장 배양기를 점검하고 있는 모습. 사진=삼성바이오로직스

◇신성장의 세 축···'로봇·바이오·6G' = 삼성이 미래 먹거리를 AI 반도체에만 걸고 있는 건 아니다. 로봇·바이오·6G는 삼성의 신성장 전략을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이다. 

2020년 CES에서 첫선을 보인 생활 로봇 '볼리(Ballie)'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사용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반려 로봇이다. 단순한 이동이나 청소가 아니라 가전 제어, 영상 통화, 반려동물 케어까지 가능한 스마트홈 허브로 기대를 모았다. 다만 출시 일정은 여러 차례 지연돼 현재로선 불투명하지만, 웨어러블 보조 로봇, 서비스 로봇 투자까지 병행하며 사업 저변을 넓히고 있다. 다만 가격, 유지비, 개발자 생태계 같은 현실적 변수가 상용화 성공의 열쇠다.

바이오는 이미 차세대 먹거리로 자리 잡았다. 송도 플랜트5가 상업 가동을 시작하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총 생산능력은 78만 리터에 달한다. 단일 기업 기준 세계 최대 위탁개발생산(CDMO) 규모다. 여기에 전 공정에 자동화와 AI 기반 품질 예측 시스템을 도입해 생산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높이고 있다는 점이 차별화 요소다. AI 전략이 반도체만이 아니라 바이오 공정 혁신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삼성은 장기적으로 6G 시대도 내다본다. 'AI-Native 네트워크'라는 비전을 내걸고 일본 NTT도코모와 협력 중이다. 6G는 단말, 클라우드, 로봇을 하나의 인프라로 묶는 '보이지 않는 플랫폼'으로 진화할 전망이다.

공격적인 인수합병(M&A)도 눈길을 끈다. 삼성전자는 2025년 5월 데이터센터 냉각 전문 업체 독일의 플락트그룹(FläktGroup) 인수 계약을 체결했고 연내 종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AI 서버가 몰려드는 데이터센터의 가장 큰 고민이 전력과 발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한 주변 사업이 아니다. HBM·GPU 같은 반도체 성능을 아무리 끌어올려도 냉각 효율을 확보하지 못하면 전체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는다. 삼성은 이번 인수를 통해 'AI 반도체–패키징–데이터센터 인프라'를 아우르는 수직 계열화의 한 조각을 채운 셈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테슬라와의 165억 달러(약 22조원) 규모 칩 공급 계약이다. 이는 단순 매출 확대가 아니다. 자율주행·로보틱스 등 미래 산업의 핵심 고객을 확보했다는 의미가 크다. 삼성의 파운드리와 메모리 기술이 글로벌 모빌리티 기업의 두뇌로 채택됐다는 점에서 기대된다.

결국 삼성의 'AI 퍼스트' 전략은 2026년 가시적으로 드러날 전망이다. 이에 삼성이 반도체와 스마트폰에 이어 AI에서도 신화를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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