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계 "투자 속도가 생존"···금산분리 완화론 확산
감독당국, 총수일가 사금고 악용 될 것 경고

[포인트데일리 윤은식 기자] 인공지능(AI)·반도체·전기차 등 미래신산업 선점을 위한 초대형 투자전쟁이 본격화되면서 금산분리 원칙이 40여 년 만에 논쟁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대기업들은 기술 경쟁 속도가 생존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기존 규제가 자본 조달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감독당국은 재벌 중심의 지배구조에서 산업자본의 금융 지배가 되살아날 경우 총수일가의 사금고로 악용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달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오픈AI 샘 올트먼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달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오픈AI 샘 올트먼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논쟁은 지난달 1일 이재명 대통령이 오픈AI 샘 올트먼 CEO와 만난 뒤 "안전장치를 전제로 규제완화 검토"를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주병기 위원장이 "100년 된 규제를 몇 개 기업 요구로 바꿀 순 없다"고 밝히면서 정부 내부에서도 입장차가 갈리고 있다. 

금산분리는 산업과 금융을 분리해 계열사 부실이 금융권으로 번지고 금융 충격이 다시 산업으로 되돌아오는 '부실 순환'을 막기 위한 제도다. 대우·기아·한라그룹이 1990년대 종금사·증권사를 동원해 계열 부실을 덮다가 금융이 먼저 무너지며 그룹이 붕괴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국금융연구원 이병윤 연구위원이 2006년 "기업지배구조 투명성과 금융사의 독립성이 확보되기 전 금산분리는 건드리면 안 된다"고 경고한 것도 같은 배경이다. 

하지만 AI반도체·파운드리·HBM·전기차 플랫폼 등은 한 번의 설비투자에 수십조원이 필요한 사업으로 기술 확보 속도가 곧 시장 점유율을 결정하는 만큼 산업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그룹 등이 공격적 투자를 이어가는 것도 이런 산업 구조 때문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AI 투자전쟁에서 필요한 자금 규모가 급증한다"고 공개 발언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금산분리완화에 따른 '위험'도 함께 커진다는 점이다. 특정 그룹의 초대형 프로젝트가 실패할 경우 이를 지원한 금융사가 충격을 떠안을 수 있고, 금융 불안이 전체 시장으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제조·데이터·금융 서비스가 결합할 때 소비자 '락인 효과'(소비자가 특정 제품·서비스를 한 번 쓰면 다른 대안으로 전환하기 어려워지는 현상)가 커져 특정 기업 중심의 생태계가 집중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주병기 공정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주병기 공정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정부 부처 간 온도차도 뚜렷하다. 공정위는 금산분리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신중론, 금융위·기재부·산업부는 첨단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금산분리가 정책 테이블에 다시 올라왔다는 점에서 변화의 흐름은 감지된다.

결국 이번 논쟁은 우리 경제가 '무엇에' 우선순위로 둘지에 대한 선택 문제에 달려있다는 조언이 나온다. 외환위기 이후 유지해온 금융안정의 원칙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글로벌 기술전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자본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지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에 금산분리가 다시 우리 경제의 미래를 좌우할 '정책 분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재계 일각은 관측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번 논의가 단기 규제 완화 여부를 넘어 중장기 자본 시스템 방향과 연결돼 있다"며 "정부가 일정한 기준과 절차를 제시하면 기업들도 그에 맞춰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산업 경쟁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만큼 제도적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정책 방향성이 명확해질 경우 투자 계획을 보다 안정적으로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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