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금산분리 검토 신중론...산업계, 자본조달 속도전
금융사 이사회 독립성·내부거래 통제 핵심 쟁점 부상
"금산분리, 완화 보다는 투자 시스템 다시 짜는 문제"
[포인트데일리 윤은식 기자] 정부가 금산분리 완화 가능성을 테이블에 올리면서 논의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산업계는 초대형 투자 경쟁에서 자본 조달 속도 확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감독당국은 금융시스템의 안정성과 시장지배력 집중 가능성을 우려하며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금산분리 논쟁은 단순 규제 논의가 아닌 우리 경제의 자본구조와 금융안전 체계 전반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 문제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투자 타이밍 곧 시장점유율 = 금산분리는 산업자본이 금융사를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다. 1990년대 대우·기아·한라그룹 등이 종금사·증권사를 이용해 계열 부실을 덮으려다 그룹과 금융사가 동시에 붕괴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최근 반도체·AI·전기차 등 전략산업에서 필요한 자본 규모가 급격히 늘어나자 규제 재검토 요구가 산업계를 중심으로 일고 있다. 반도체·AI·전기차·파운드리 같은 전략산업은 한 번의 설비투자에 수십조원이 필요하고 투자 타이밍이 곧 시장 점유율을 좌우한다. 때문에 산업계에서는 금산분리가 현재 투자 환경과 맞지 않다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최근 "AI 투자 전쟁에서 필요한 자금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밝히면서 금산분리 규제의 조정 필요성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앞서 대한상공회의소는 올해 10월 정기국회에 제출한 '생산적 금융 활성화' 건의에도 금산분리 관련 규제 완화 과제가 포함됐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첨단산업의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지금 처럼 규제에 막혀 있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 질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 내부에서도 금산분리 제도 개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모양새다. 다만 정부는 구체적인 방향이나 내용이 결정된 것은 없다며 공식적으로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규제 완화 여부와 범위는 부처 간 협의가 필요한 초기 단계인 것으로 보인다.
주무 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는 명확히 신중론을 유지하고 있다. 주병기 공정위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100년 가까이 유지된 원칙을 몇 개 기업 요구로 바꿀 수는 없다"며 금산분리 완화에 선을 그엇다. 산업자본의 금융지배가 강화될 경우 금융사 의사결정의 왜곡과 계열사 부실이 금융권으로 전이되는 위험이 여전히 크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 위원장은 25일 MBC라디오 김종배 시선집중에 출연해 "기업 자체 자금 조달 여력이 규제 때문에 어렵다면 반도체 특별법 등의 한시적 제정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일각에선 특정 그룹이 금융사를 지배할 경우 리스크가 시장 전체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금산분리가 금융시스템에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규제 완화 뒤 위험 관리에 쏠리는 시선 = 산업계 요구와 감독당국의 우려가 부딪치면서 규제 완화 보다 완화 뒤 생길 위험을 어떻게 관리할지로 옮겨가는 분위기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금융사의 이사회 독립성 유지 장치다. 산업자본이 유입되더라도 금융사의 의사결정 구조를 유지할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열사 내부거래 감시 강화도 핵심 과제다. 과거 대우기아 사태처럼 그룹 내 부실이 금융사 부실로 이어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내부거래 규제를 강화하고 감독당국의 실시간 모니터링 기능 확대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금산분리 완화는 향후 정부·국회·감독당국·산업계가 모두 참여하는 논의 과정을 거치며 구체적인 형태가 잡힐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정책 방향 결정시 국내 자본시장은 물론 전략산업 투자구조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되는 만큼, 우리 경제의 중요한 정책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다만 부처 간 시각차가 뚜렷해 단기간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단순히 규제를 완화하느냐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 기업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본을 조달하고 투자할지 자본 시스템을 다시 짜는 문제"라면서 "정부의 방향이 명확하다면 기업들은 그에 맞춰 나갈 수 있는데 정책의 불확실성이 가장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