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정의선 등···한·미 관세 인하 실질 주역
재계가 이끈 '글로벌 AI 인프라 생태계 핵심 축'

[포인트데일리 윤은식 기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정부 외교라인 못지않게 우리나라 '재계의 실질 외교'가 빛났다. 한·미 관세 인하와 핵추진 잠수함 기술 협력, AI 허브로의 도약 등 이번 회의에서 나온 주요 성과들은 정부와 함께 우리 기업이 만들어낸 '경제안보 복합전략'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APEC이 지난 1일 막을 내렸다. 지난달 29일부터 31일까지 진행한 APEC CEO 서밋에는 글로벌 CEO와 각국 정상급 인사 1700여 명이 참석했다. 이재명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등 정상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 그룹 회장 등 국내 재계 총수가 총 출동했다. 제슨 황 엔비디아 CEO 등 글로벌 CEO들도 한 자리에 모였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하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하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돈의 논리'를 신뢰로 바꾼 'K-재계' = APEC이 열린 경주는 세계 경제 질서의 축소판이었다. 각국 정상이 외교적 메시지를 나누는 무대지만 실제 성과는 산업 현장에서 결정됐다. 이번에도 그 공식은 예외가 아니었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우리 핵심 산업을 대표하는 총수들은 APEC 개막 전부터 이미 '산업 채널'을 가동하며 물밑 협상에 들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는 '돈'에서 시작했다. 2018년 집권 1기 때도, 2025년 집권 2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번엔 결말이 달랐다. 우리 재계가 트럼프 1기에는 투자 패키지로 압박을 풀었다면 이번에는 '신뢰 구조'로 트럼프 돈의 논리를 바꿔놨다.

2018년 한미 FTA 개정 협상 당시 트럼프는 "한국이 미국산 자동차에 문을 닫고 있다"며 25% 고율 관세로 압박했다. 이에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청와대가 아니라 재계였다. 당시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곧바로 워싱턴으로 날아가 30억 달러 전기차 공장을 약속했고, 삼성과 SK도 반도체·배터리 투자로 트럼프의 정치적 명분을 채워줬다. 트럼프는 "양국은 교역 분야에서 보기 드문 성공적 모범사례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2025년 집권 2기 들어서는 통상 압박이 더 강했다. 한국산 제품에 25% 관세를 예고하고, 방위비 분담 조정까지 꺼내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재계가 먼저 움직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 김동관 한화 부회장이 워싱턴을 찾아 '실리 외교'를 펼쳤다.

현대차는 65억 달러 규모의 전기차 생산라인 증설을, 삼성은 반도체 장비 공동조달을, 한화는 미 해군 프로젝트 협력을 제안했다. 트럼프가 원하는 '돈과 일자리'를 재계는 '신뢰와 동맹'으로 맞받았다.

그 결과 APEC기간 중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산 자동체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미국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투자 파트너"라고 밝혔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30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GPU) '지포스' 출시 25주년 행사에서 단상에 올라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30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GPU) '지포스' 출시 25주년 행사에서 단상에 올라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핵잠 승인과 AI 동맹'...재계가 이끈 외교 =  관세 인하 못지 않게 이번 APEC의 성과는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이다. 미국이 동맹국과 핵기술 협력을 공식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계 등에 따르면 이번 결정은 우리 기업들의 대미 투자 및 미국 내 고용과 산업 육성에 기여한 점이 핵잠수함 건조 승인 배경으로 지목된다.

APEC CEO 서밋 역시 실질 외교의 무대였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핵심 산업을 대표하는 총수들이 경주와 서울을 오가며 글로벌 CEO와 교류했다. 가장 주목받은 장면은 이재용·정의선·젠슨황 CEO의 치킨 회동이다. 지난달 30일 세 사람은 서울 강남 삼성동에서 치맥으로 친분을 다졌고 이는 곧바로 실질적 성과로 이어졌다. 엔비디아는 우리나라에 26만장 익상의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공급한다고 발표했다. 정부와 삼성·SK·현대차·네이버 등에 각각 5만장, 네이버에 6만장을 공급하기로 했다. 

전 세계적으로 GPU 공급난이 심화한 상황에서 우선 GPU 공급권 확보는 우리나라가 AI 인프라 생태계의 핵심 축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신호다. GPU 확보로 우리나라 전반에 AI 전환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인 데다 엔비디아의 'AI 인프라 생태계'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의 주권형(소버린) AI 구축도 빨라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젠슨 황 CEO는 "AI는 인류의 산업 지형을 바꾸고 있다. 한국은 그 중심에 설 자격이 있다"고 밝혔다.

APEC 마지막날인 지난 1일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 주석 만찬에도 이재용·정의선·최태원·구광모 등 4대 그룹 총수가 참석했다. 

이외에도 장인화 포스코 그룹 회장은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와 이차전지 소재와 에너지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고,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데이비드 퍼듀 주중 미국 대사와 미중 갈등 속 조선 제재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정기선 HD회장은 APEC CEO서밋 첫날 퓨처테크 포럼 기조연설자로 나서 미국 조선업의 파트너십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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