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무기로 부상한 '희토류·AI칩’…’점유율 80%’ 한국 HBM의 위치는
증권가 "삼성 점유율 최대 40%, SK 65% 확보" 전망 HBM4 시장서 마이크론 '엔비디아 요구' 못맞추나 학계 "HBM, 희토류·AI 칩 위상 아냐...기술력 갖춰라"
[포인트데일리 이준 기자] 미국의 ‘엔비디아’, 중국의 ‘희토류’ 등 전통적으로 독보적인 자원은 외교 무기로 자리 잡아 협상을 시도하는 무기로 여겨진다. 우리나라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해 메모리 반도체는 전 세계 빅테크 거물들이 직접 찾아 러브콜을 보내는 위상을 지녔으나 무기로 삼기에는 아직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은 엔비디아 중국으로 향하는 인공지능(AI) 칩의 수출길을 막고 있다. 저가형 ‘H20’(현재는 대중 수출 가능)에 이어 보다 개선된 ‘B20’ 역시 수출 규제 대상으로 오르면서 불발됐다. 엔비디아의 AI 칩은 약 20년간 견고하게 쌓아온 플랫폼 ‘쿠다’(CUDA)를 중심으로 압도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
이 같이 엔비디아를 무기로 삼는 기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3일(현지시간) 로이터에 따르면 트럼프는 최근 “(엔비디아 칩 등) 가장 앞선 것들은 미국 외에는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엔비디아는 미국의 동맹국 한국으로부터 그래픽 처리 장치(GPU) 26만장을 공급 계획을 발표한 이후로 업계에서는 트럼프의 발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중국은 사실상 독점 공급 중인 희토류로 미국을 견제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고율관세 등의 이유로 희토류 카드를 꺼내들었다. 최근에는 미중 무역합의 이후 다시금 희토류를 대량 공급받고 있다. 21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중국 해관총서는 지난달 대미 희토류 자석 수출량이 656톤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 1월 이후 역대 최대치다. 다만 미국은 지난 19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에 희토류 생산 설비를 구축하기로 합의하면서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 역시 진입장벽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HBM 시장의 점유율 80%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2분기 SK하이닉스의 HBM 점유율은 64%이며, 마이크론(21%)과 삼성전자(15%)가 뒤를 잇는다.
올해 4분기와 내년 초 격화될 ‘HBM4’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점유율 40%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SK하이닉스 역시 지위를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본부장은 최근 리포트를 통해 “(삼성전자의) HBM4 공급 점유율은 최대 40%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또 다른 리포트에서는 SK하이닉스가 60~65% 점유율을 확보할 것으로 내다봤다.
최근 마이크론은 HBM4에서 고객사가 요구한 조건에 맞추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콩 GF증권 등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3사 중 유일하게 엔비디아가 제시한 데이터 처리 속도인 10Gbps를 맞추지 못했으며, 재설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개한 HBM4의 속도는 각각 11Gbps와 10Gbps 수준이다. 이 같은 여유는 공급 가격에서 드러난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로 향하는 HBM4 가격을 인상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만 매체 디지타임즈는 지난 6일(현지시간) 업계 소식통을 인용해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로 향하는 HBM4 가격을 전 세대(HBM3E) 대비 50% 인상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AI 칩과 희토류와 같이 공급량을 조절해 외교적 무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문송천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미국과 중국은 2강 체제로 경제 최강국”이라면서 “한국과 같은 국가는 불가능하다. 일본, 독일, 영국과 같은 국가도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HBM은 GPU의 메모리 병목 현상을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면서 “세계적으로 메모리 강국이 많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빈 자리를 꿰 찰 여력이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특히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ASML과 같이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 진입만 한다면 시간 문제라는 것이 문 교수의 설명이다.
국내 HBM이 AI 칩과 희토류만큼의 위상을 갖기 위해선 기술력 확보가 우선 과제로 꼽힌다. 조연성 덕성여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HBM의 성장을 위해선 혁신기술 개발이나 공정 혁신이 제일 우선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업계에 따르면 추론형으로 변하는 AI 시장에 맞춰 삼성전자는 저전력 D램을 활용하는 ’소캠’(SOCAMM)을 개발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낸드 플래시를 활용해 대역폭을 크게 높인 ‘고대역폭플래시메모리(HBF)에 발을 들였다.
다만 HBM이 경쟁력을 갖추면서도 무기로써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동시에 제기된다. 조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내수시장이 (중국과 일본 등에 비해) 작다”면서 “(HBM 공급망 차단에 대한 대응으로) 수출이나 해외 투자가 막힌다면 결국 고생하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HBM과 같은 산업재를 정치적인 전략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