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앞 145m 빌딩, 개발이냐 문화유산 보존이냐

국가유산청·서울시 정면 충돌…유네스코 영향평가 권고에 개발 동력 약화 우려 종묘 경계 180m 밖 고층화 계획, 역사 보존과 도심 개발 충돌로 정치 쟁점화

2025-11-19     박일한 기자

[포인트데일리 박일한 기자]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일대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18일 '세운4구역' 재개발 시뮬레이션을 공개하며 "종묘 경관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지만, 국가유산청과 유네스코는 세계유산영향평가를 받을 때까지 사업 승인을 중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 왜 지금 갈등이 폭발했나

세운4구역은 종묘에서 남쪽으로 약 18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2만7000㎡ 규모 재개발 구역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30일 이 구역의 건물 최고 높이를 기존 종로변 55m·청계천변 71.9m에서 '종로변 101m·청계천변 145m'로 상향하는 재정비촉진계획 변경안을 고시했다. 개방형 녹지를 추가 확보하는 대가로 더 높이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서울시는 종묘 경계에서 100m 내 건물은 최고 높이가 27도 각도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앙각 규정을 세운4구역까지 확대 적용해 실제로는 종로변 98.7m, 청계천변 141.9m로 계획했다고 밝혔다. 세운4구역은 법적으로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종묘 경계 100m 이내) 밖에 있지만, 종묘 경관을 고려해 자체적으로 규제를 강화했다는 설명이다.

이번 고시가 가능했던 것은 대법원 판결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최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 밖에서는 지방자치단체 재량에 따라 개발 규제를 완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따라 서울시는 절써 서울시가 종묘에서 100m 밖에 있는 지역인 세운4구역의 높이 기준을 완화했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종묘 너머로 세운4구역 재개발 지구가 보이고 있다.[연합뉴스]

◇ 유네스코 "사업 중지" vs 서울시 "경관 훼손 없다"

대법원 판결로 법적 논란을 일단락됐지만, 정치적·제도적 논쟁은 오히려 격화됐다.

 

국가유산청은 1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가 15일 공식 문서를 통해 세계유산영향평가(HIA)의 긍정적 검토가 끝날 때까지 사업 승인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세운4구역 고층 개발이 세계유산 종묘 경관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라며 "유네스코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중 2구역과 4구역을 특정해 문제를 제기했다"고 강조했다.

국가유산청은 유네스코로부터 지난 3월 HIA 실시 권고를 받았고 이를 세 차례 서울시에 전달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등 시민단체가 유네스코 본부에 "종묘 경관 훼손 우려"를 담은 서한을 보낸 것도 유네스코 결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서울시는 18일 종묘 정전 상월대에서 세운4구역을 바라본 3D 시뮬레이션을 공개하며 반박했다. 오세훈 시장은 "정전에서 평균 신장의 서울시민이 섰을 때 시야 가운데는 남산타워가 보이고 좌측으로 세운지구가 위치한다"며 "정전에 섰을 때 눈이 가려지거나 숨이 막히거나 기가 눌리는 압도적 경관은 전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운4구역이 정전의 시야각 30도 범위 밖에 있어 경관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서울시는 또 "국가유산청이 HIA 시행의 법적 전제가 되는 세계유산지구 지정조차 하지 않다가 세운4구역 재개발이 쟁점화된 이후 뒤늦게 지정했다"며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30년이 지났지만 완충구역조차 확정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 토지주들 "선정릉엔 고층빌딩, 종묘는 안 되나"

세운4구역 토지주들도 19일 입장문을 내고 "세계문화유산인 강남 선정릉은 고층 건물이 즐비한 강남 CBD 핵심 권역 내에 있지만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며 "선정릉으로부터 약 250m 지점에 포스코센터빌딩(151m)과 DB금융센터빌딩(154m)이 있고, 500~600m 지점에 무역센터빌딩(227m)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영국 런던타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후 문화유산으로부터 400~500m 지점에 재개발이 이뤄져 세계적 명소가 됐다"며 "일본 도쿄 왕궁도 주변 고도 제한을 풀어 200~385m 빌딩군이 들어서며 관광객을 불러 모았다"고 해외 사례를 언급했다.

세운4구역은 종묘 정전에서 청계천변 고층 빌딩까지 600m 이상 거리가 떨어져 있다. 토지주들은 "주 시야각 60도 밖에 위치해 잘 드러나지도 않는 지역인데 유독 세운4구역만 콕 집어 맹목적 높이 규제를 20년 넘게 강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업 지연으로 인한 주민 피해도 심각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오 시장은 "현재 금융 이자만 연 170억원에 육박하며, 세계유산영향평가에 통상 2~3년이 걸리면 주민들은 약 500억원대 빚을 떠안게 된다"고 우려했다.

세운지구의 노후화도 심각하다. 서울시에 따르면 세운지구에는 30년 이상 된 노후 건축물이 97%에 달하고, 붕괴·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축물이 57%를 차지한다. 이들 건축물의 40% 이상이 현 소방시설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며, 소방차 진입에 필요한 최소폭 6m가 확보되지 않는 도로가 65%에 이른다. 2023년 9월에는 세운상가 외벽 일부가 떨어지면서 지역 상인이 다치는 사고도 발생했다.

◇ 녹지축 조성이냐, 문화유산 보존이냐

서울시는 세운지구 재개발의 핵심 가치로 '녹지축 조성'을 내세운다. 세운상가군을 단계적으로 철거하고 그 자리에 약 5만㎡ 대규모 도심 공원을 조성해 북악산에서 종묘와 남산을 잇는 도심 녹지축을 완성한다는 구상이다. 오 시장은 "종묘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녹지축을 조성해 종묘의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생태적 접근성을 높이는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종묘는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이라며 "종묘 앞마당은 단순한 공터가 아니라 서울의 역사와 정체성이 숨 쉬는 상징적 장소다. 그 앞에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순간 서울의 품격은 빛을 잃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전문가들은 세운4구역 논란은 청계천 복원, 롯데월드타워 건설 등 서울의 역대 대형 개발 사업이 겪었던 정치적 갈등의 연장선에 있다고 평가한다. 보수 성향 단체장이 대형 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진보 진영이 교통·안전·경관·투기 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양상이 반복되는 데 따른 것이다. 허민 청장은 "서울시·문체부·국가유산청이 참여하는 조정 회의를 조속히 구성하자"고 제안했지만, 유네스코가 한 달 내 의견 회신을 요구한 만큼 빠른 시일 내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