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식의 시시콜콜] 임진왜란·일제, 이젠 고층건물...종묘의 비애
[포인트데일리 윤은식 기자] 조선 왕조 시조들을 모신 제단이자 세계유산인 종묘는 조선 왕실 제례 정통성이 응축된 공간이자, 일제에 짓밟힌 국권의 상흔과 해방 이후 더딘 복원이 교차하며 우리 근대사의 굴곡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현장이다.
1932년 조선총독부는 종묘와 창경궁 사이를 가르며 관통도로(현재 율곡로)를 만든다. 창경궁과 종묘를 잇던 숲길이 잘리고 제례 동선도 단절되면서 조선 왕실 권위의 심장부는 식민지 근대화 부속물로 전락하고 만다. 더욱이 일왕의 연호 '소화' 글자가 종묘 담장 곳곳에 박히며 국권침탈의 뼈아픈 역사가 깊게 패이게 됐다.
종묘는 1592년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해 소실되는 변을 당하기도 했다. 왜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선조는 도성을 비우고 피란을 떠나는데 이때 왕과 함께 도성을 빠져나간 것이 종묘의 신주(神主)들과 사직 위판(位版)이다. 선조가 다시 도성으로 돌아왔을 때 종묘는 이미 불타버렸다.
광복후에도 종묘는 일제에 베인 상처를 빠르게 치유하지 못했다. 서울의 고도성장기 종묘는 주변 상권과 도심 도로망 사이에 고립돼 유적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5호 지정,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2022년 서울시는 율곡로 일부를 지하화하고 끊긴 숲길과 담장을 잇는 복원사업을 추진한다. 담장 주변으로 조성된 8000㎡ 규모 숲에는 창경궁과 종묘에 많은 참나무류와 소나무, 귀룽나무, 국수나무, 진달래 등 한국 고유 수종 760주, 관목·화초를 심었고 복원된 궁궐 담장을 따라 산책할 수 있는 폭 3m 길도 냈다. 일제가 갈라놓는 창경궁과 종묘가 90년만에 이어졌다.
종묘는 이처럼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숱한 상처를 안은 통한의 역사다. 이런 상황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종묘 남쪽 세운4구역에 최고 142m 높이 고층 건물을 허용하는 재개발을 추진하면서 종묘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최근 대법원이 서울시가 문화재 인근 고층 건축물 규제 조항을 삭제한 것이 위법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종묘 앞 고층 건물 건축은 가능해졌다. 문제는 고층 건물 건출 가능 여부가 아니다. 고층 건물이 들어섰을때 종묘의 시야와 주변 경관이 어떻게 달라지는 가 즉 세계유산으로 종묘의 가치를 지탱해온 시각적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가 핵심이다.
종묘 정전 앞마당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이 문제는 더욱 선명해 진다. 현재는 하늘선과 도심 지형이 열린 상태지만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그 프레임은 필연적으로 바뀔수 밖에 없어 보인다. 유네스코가 이레적으로 세계유산영향평가를 요구한 것도 이 지점 때문이다.
종묘의 복원은 물리적인 공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이 지닌 역사성과 상징성을 어떤 기준으로 관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종묘 앞 고층개발 문제는 단순한 도시 재개발 이슈로 봐서는 안되는 이유다. 이런 물음표는 결국 도시 개발과 역사 보존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기준을 선택해야하는지에 닿는다.
더군다나 일제에 의해 끊겼던 종묘 주변의 공간을 90년 만에 어렵게 되살린 지금, 그 자리에 다시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되물어볼 일이다. 세계유산의 품격을 지키겠다는 약속보다 개발 논리가 앞선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 채 또 한 번 역사의 문턱을 넘게 될지 모른다.
임진년 왜군에 의해 전각이 불타 사라지고, 일제강점기엔 몸통까지 도로에 잘려나간 종묘 앞에 높이 142m 건물이 들어선다면 '복원'이라는 단어를 더는 쉽게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포기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답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