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만으론 5년 못 버틴다"...취재 최전선이 본 한국 경제
세계 무역질서 대전환⑩ 총체적 지경학 시대 생존전략 취재기자 방담 "세계 기술 재편 시대...한국경제 4대 뇌관은?"
포인트데일리는 창간9주년을 맞아 '총체적 지경학 시대'를 주제로 기획보도를 진행했다. 기술과 기후, 에너지, 금융까지 모든 영역이 지정학적 무기가 되는 시대, 세계 무역질서의 대전환을 9개 분야로 나눠 심층 분석했다. 한국 경제의 현재 위상과 향후 전략 과제를 점검한 취재진이 한자리에 모여 기사에 담지 못한 현장의 목소리와 고민을 나눴다.
사회 | 윤은식 산업부장
패널 | 권상희(산업부), 송가영(소비자경제부), 김종혁(금융증권부), 이준(IT벤처부) 기자
정리 | 권상희 기자
"정책 효과의 역설과 분절된 대응"
윤은식 부장(이하 윤) | 세계 무역질서 대전환이라는 큰 주제를 취재하면서 각자 어떤 점을 가장 크게 느꼈나?
권상희 기자(이하 권) |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정책을 추적하면서 정책의 의도와 결과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목격했다. 중국의 첨단산업 성장을 억제하려던 조치들이 오히려 중국의 자립을 가속화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경제와 산업 질서는 변수가 워낙 많아 정책 효과를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송가영 기자(이하 송) | 탄소중립 논의 과정에서 가장 큰 배출국인 중국이 배제되고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만 진행되는 구조적 한계를 절감했다. 유럽 내부에서도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실효성에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철강, 식량안보 등 대응이 파편화돼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정부가 기업과 중장기 로드맵을 공유하며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특히 식량 생산률 급감에 대한 국가 차원의 대책은 여전히 미비한 수준이다.
김종혁 기자(이하 김) | 금융 분야에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성패가 향후 판도를 좌우할 것으로 본다. 만약 실패한다면 달러 스테이블코인 확산에 대응할 수단이 규제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미국과의 마찰도 불가피하다. 한국은 금융 안정성과 인프라 측면에서 강점을 갖고 있지만,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성과를 담보할 수 없다. 금융권은 안정성에, 핀테크는 혁신에 각각 강점이 있으니 정부가 두 영역을 조율할 제도적 틀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이준 기자(이하 이) | 데이터와 반도체가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데이터는 이미 축적한 기업이 압도적 우위에 서게 될 것이고, 개인정보 규제 때문에 신규 기업의 진입장벽은 갈수록 높아진다. 결국 AI 시대의 승부는 데이터 독점 여부가 가를 것이다. 반도체 분야는 미국의 대중 관세 부담이 크고, 마이크론이 HBM 시장에서 존재감을 확대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압박받는 구도다.
윤 | 자원의 무기화는 사실 낯선 개념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나 한나라 시절부터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보급로 차단이 승패를 가른 핵심 요인이었다. 다만 오늘날 문제는 자원이 유한하다는 점이다. 전 세계가 탄소중립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면 자원 무기화와 블록화가 언제까지 유효할지 의문이다. 한국은 자원 빈국이다. 공급망 다변화만이 해법은 아니다. 무한히 활용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개발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방향성 없는 정책, 흔들리는 일관성"
윤 | 세계 무역질서 대전환에 대처하는 정부의 정책과 방향성을 어떻게 평가하나?
송 | 그린보호주의를 취재하면서 특히 느낀 건, 다른 나라 정부들은 자국 우선주의를 명확히 드러내는데 한국은 방향성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몇 년 전부터 같은 지적이 있었는데 정권이 바뀐 후에도 체감할 만한 변화가 크지 않다. 불리한 정책을 빠르게 포착해서 부처 간 협업으로 신속하게 대응책을 마련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권 | 핵심광물 분야만 놓고 보면 2023년 정부가 발표한 '핵심광물 확보전략'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짜여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문제는 정책의 지속가능성과 일관성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조가 흔들리면 산업 현장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 반도체 전망은 어둡지만 AI 분야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이다. 영국 매체 분석에서도 한국의 AI 정책은 상위권에 꼽혔다. 구글과 지도 데이터 반출을 둘러싼 갈등에서도 정부 대응은 전문가들에게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대규모 투자와 데이터 전략이 제대로 이어진다면 AI는 반도체에 이어 한국 경제를 이끄는 핵심 산업이 될 수 있다.
김 | 스테이블코인도 비슷한 상황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글로벌 논의가 빨라지면서 한국도 뒤늦게 뛰어들고 있다. 제도 미비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논의가 가속화된 만큼 좋은 제도가 마련될 가능성도 함께 열려 있다.
"식량 위기와 반도체 사이클"
윤 | 우리나라 주력 산업이 반도체이긴 하지만, 앞으로 반도체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다는 우려가 많다. 늘 따라붙는 얘기가 공급망 다변화인데, 식량이나 수자원 같은 다른 자원도 경쟁력이 될 수 있지 않겠냐는 반문도 들었다.
송 |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식량이다. 우리나라는 식량 수입 의존도가 이미 80%에 달해 외부 공급망을 다변화하기가 사실상 어렵다. 국내에서 자급 방안을 찾자면 결국 임야 개발 같은 카드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현장에서 꾸준히 나온다. 다만 환경단체의 반발과 정부의 보수적 태도 때문에 논의가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이미 공급 차질이 심각해서 5년 안에도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외면하지 말고 임야 개간과 함께 스마트팜 확대 등 현실적 대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윤 | 반도체는 한국이 강점을 가진 분야지만 '위기론'은 다소 과장됐다고 본다. 기술에는 사이클이 있고, 데이터센터와 AI, HBM 등 핵심 영역에 집중해야 한다.
이 | 메모리 반도체는 데이터센터와 AI 수요 확대 덕분에 여전히 수요가 크고 가격도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파운드리는 TSMC에 밀리고 있고, NPU는 엔비디아에 비해 역량이 부족하다. 정부가 추진한 국가 AI 데이터센터 사업도 유찰되며 난항을 겪고 있다. 그래도 스타트업과 벤처가 데이터를 쌓을 기회를 열어주고 생태계를 구축한다면, AI는 반도체를 잇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
송 | 문제는 정부 태도다. 특정 기업을 겨냥한 '타깃 규제'가 반복되면서 기업들이 보수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네이버에 이어 지금은 카카오가 타깃이 됐고, 스타트업 투자도 크게 위축됐다. 정부는 규제와 지원 중 무엇을 할지 분명히 하고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김 | 금융 역시 규제산업인 만큼 정부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핀테크와 기존 금융권이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이를 조율하는 중재자 역할이 필요하다. 규제 일변도가 아니라 균형 잡힌 정책 결정이 중요하다.
권 | 기업들은 나름대로 대응을 잘하고 있다. 포스코가 원재료 확보를 위해 해외 협약을 맺거나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다만 정부는 불필요한 규제를 줄이고 필요한 부분에 '핀셋 지원'을 해야 한다. 기존 석유화학과 철강 등 국내 주력산업은 중국의 저가 공세와 글로벌 수요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리하게 살리기보다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위기 속 기회, 한국의 선택"
윤 | 이번 기획은 위기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오히려 세계 기술질서 재편은 한국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나?
이 | 무역질서 재편은 국내 문제 해결의 기회이기도 하다. 저출산 등으로 인한 인력 부족 문제를 AI나 제조업 혁신과 접목하면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 수 있다.
김 |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미국 정책의 큰 방향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논의가 빨라진 덕분에 한국도 제도 정비를 앞당길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송 |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자국 우선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한국은 글로벌 전환 속에서 자국 이익을 내재화할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10~20년을 내다보고 기반을 다질 시기다.
권 | WTO 출범 이후 세계화가 당연시됐지만, 지금은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변동성에 적응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AI, 에너지 믹스 전환 같은 큰 변화를 한국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윤 | 결국 '위기는 곧 기회'라는 점에 의견이 모인다. 글로벌 패권 경쟁 속에서 단순히 공급망 다변화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세계 기술 재편의 중심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할지 고민해야 한다. WTO가 우루과이라운드에서 출발했듯 지금은 '트럼프 라운드'처럼 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이번 시리즈가 한국이 세계화 속에서 어떻게 기회를 만들 것인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