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무관세 시대 끝...반도체 지도 대격변
세계 무역질서 대전환⑧ 반도체 왕좌의 게임 TSMC, '美 뒷배' 인텔 급부상에 위치 바뀔까 삼성전자, 레거시·첨단 '투트랙' 파운드리 반격 SK하이닉스, '중국·엔비디아' 이중고 해결 과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90여 년 만에 미국 평균 관세율이 20%를 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축된 자유무역 질서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제 무역전쟁은 단순한 관세 분쟁이 아닙니다. 기술 표준부터 탄소국경세, 핵심 광물 공급망, 데이터 주권, 금융 결제망까지 모든 영역이 지정학적 무기로 활용되는 '총체적 지경학(Geoeconomics) 시대'가 열렸습니다. 세계 10위 무역대국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효율성과 안보 사이에서, 시장과 동맹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본지는 창간 기획 '자유무역의 종언-쪼개진 세상에서 한국의 생존전략' 10회 연재를 통해 변화하는 글로벌 무역 질서를 진단하고, 한국의 생존전략을 모색합니다.
[포인트데일리 이준 기자] 지난 1월 7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 2025 현장.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기조연설을 통해 새로운 AI GPU '블랙웰'과 차세대 RTX5090 시리즈 출시 계획을 발표하자 현장은 술렁였다.
이 칩에 탑재되는 그래픽 메모리로 미국 마이크론의 GDDR7을 선택했다는 소식은 반도체 업계를 놀라게했다. GDDR7은 해당 시장 점유율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텃밭으로 엔비디아의 차세대 칩 역시 삼성전자의 GDDR7이 사용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었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마이크론의 주가는 즉시 폭등했다. 이후에도 젠슨 황의 입에서 나온 파트너사 명단에 따라 주가가 요동치며 수십조원 규모의 시장 판도가 실시간으로 재편됐다. 엔비디아 중심의 생태계는 더욱 굳건히 가속도를 낼 것이란 분석이 잇따랐다. 글로벌 무역전쟁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반도체 패권 경쟁의 축소판이다.
현재 반도체 업계는 전례 없는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1997년 체결돼 28년간 반도체 무역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온 세계무역기구(WTO)의 '정보기술협정(ITA)'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로 사실상 무력화됐다. 반도체는 다시 관세 협상 테이블에 올라 치열한 반도체 전쟁의 승패를 가를 주요 변수가 됐다.
◇트럼프발 관세 폭탄… 한국 반도체 업계에 23조원 직격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예고한 반도체 "100% 관세" 위협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한국무역협회 분석에 따르면 미국이 25%의 관세만 적용해도 연간 5조원 이상의 피해가 예상된다. 산업통상자원부 집계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의 대미 수출 1278억달러 중 반도체가 약 107억달러(15조원)로 8%나 차지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관세로 인한 가격 상승이 완제품으로 전이되면서 파생되는 간접 피해가 훨씬 클 것이라는 점이다. 스마트폰, 컴퓨터, 자동차 등 반도체가 핵심 부품으로 들어가는 모든 제품이 관세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단순한 위협에 그치지 않고 '미국내 생산' 확대 필요성에 대한 강력한 압박이 될 수 있다. 과거 없던 새로운 형태의 통상 압박이다.
◇왕조 지키는 TSMC vs 급부상하는 인텔… 파운드리 판도 대격변= 혼란스러운 시기에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저마다의 생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가장 주목받는 것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의 지각변동이다.
현재 파운드리 시장의 절대 강자는 대만 TSMC다. 2분기 기준 약 70%의 압도적 시장점유율을 바탕으로 반도체 왕조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왕조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바로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급부상하고 있는 '인텔' 때문이다.
파운드리 사업 매각 위기까지 몰렸던 인텔은 미국 행정부가 지분 약 10%(24조원)를 투자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가 인텔에게는 기회가 된 것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미국이 AI 반도체의 핵심인 최신 공정을 자국이 좌지우지하고 싶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TSMC의 핵심 고객들이 인텔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엔비디아는 인텔에 50억달러를 투자하며 PC·데이터센터용 칩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애플도 인텔로부터 투자 유치 요구를 받았다고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팀 쿡 애플 CEO가 과거 "경쟁은 파운드리 산업에 좋은 일"이라며 "인텔이 부활하길 기대한다"고 말한 것이 현실이 되고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의 역습… 첨단·레거시 투트랙 전략=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7.3% 수준인 삼성전자는 최근 반격의 신호탄을 쐈다. 테슬라와 애플 등으로부터 첨단·레거시 공정 수주가 잇따르고 있다.
삼성전자의 비밀무기는 지리적 이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 기업에게도 미국 내 투자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미국에 파운드리 팹(테일러·오스틴)을 운영하고 있는 삼성전자가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 내년 완공 예정인 테일러팹은 총 370억달러가 투입됐으며, 2nm 공정으로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현재 테슬라의 자율주행칩 생산이 확정된 상황에서 추가 계약도 기대되고 있다.
일본 닌텐도 등과 체결한 레거시 계약 외에도, 삼성전자는 첨단 공정에 집중해 파운드리 시장에서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반도체 전쟁이 격화되면서 '제2의 선택지'로서 삼성전자의 가치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하이닉스의 이중고… HBM 왕좌 지키기 vs 중국 자립화= SK하이닉스도 이중고에 직면해 있다. 2013년 세계 최초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개발한 이후 12년간 뚝심으로 기술을 발전시켜 현재 62%의 시장점유율(2분기 기준)을 확보했지만, 도전자들의 거센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먼저 미국의 마이크론의 도전이다. 21%의 시장점유율로 2위에 오른 마이크론은 내년도 HBM 물량 완판을 자신하며 SK하이닉스를 맹추격하고 있다. 엔비디아가 HBM4(6세대) 동작 속도를 표준인 8Gbps를 뛰어넘는 10~11Gbps로 요구하면서 속도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3사의 HBM 속도에 대한 이견이 존재한다"면서도 "SK하이닉스가 HBM4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는 업계 최초로 HBM4 개발을 완료해 양산 체제를 구축했으며, 차세대 노광 장비 '하이 NA EUV'를 양산용으로 도입했다.
두 번째이자 더 심각한 도전은 중국의 반도체 자립화다. 미중 반도체 전쟁이 격화되면서 중국 내 반도체 자립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화웨이는 SK하이닉스가 공급하던 HBM을 자체 개발 메모리로 대체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SK하이닉스에게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음이다.
◇AI 호황 vs 스마트폰 침체… 수요 방정식의 질적 변화= 반도체 시장은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두 흐름이 공존한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 스마트폰 시장 성장 전망을 1.5%에서 0%로 하향 조정했지만, AI 반도체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수요 방정식의 질적 변화'는 기업의 생존이 'AI 사이클' 대응력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업계에선 반도체 대전쟁의 향방을 가늠할 세 시나리오가 존재한다고 분석한다. 먼저, TSMC가 압도적 기술력과 고객 포트폴리오로 독점 체제를 유지하는 시나리오다. 두번째는 삼성전자가 테일러 공장의 지정학적 우위를 활용해 의미 있는 반격에 성공하는 시나리오다. 마지막은 SK하이닉스가 HBM 중심의 AI 생태계에서 새로운 패권을 구축하는 시나리오다.
28년간 지속된 반도체 무관세 시대의 종료는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의 근본적 재편을 의미한다. 앞으로의 반도체 경쟁은 기술력과 함께 지정학적 포지셔닝, 고객 관계, 불확실성 대응 능력이 핵심이 될 것이다.
TSMC는 왕조를 지키려 하고, 삼성은 왕좌를 탈환하려 하며, SK하이닉스는 새로운 왕좌를 만들고 있다. 진짜 승자는 급변하는 환경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는 기업이 될 것이다. 2025년은 새로운 반도체 왕조가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 결정되는 분수령의 해가 될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