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 배출량이 곧 관세다"...'탄소 샌드위치'에 갖힌 韓기업

세계 무역질서 대전환③그린보호주의의 습격 EU 탄소국경조정제도·美 청정경쟁법 협공 국내 철강 등 제조기업 타격 불가피 기후 변화 대응위한 불가피한 선택 가능성도 수입 의존도 높은 韓…전문가들 "생산 적지 지속 발굴해야"

2025-09-15     송가영 기자

1930년대 대공황 이후 90여 년 만에 미국 평균 관세율이 20%를 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축된 자유무역 질서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제 무역전쟁은 단순한 관세 분쟁이 아닙니다. 기술 표준부터 탄소국경세, 핵심 광물 공급망, 데이터 주권, 금융 결제망까지 모든 영역이 지정학적 무기로 활용되는 '총체적 지경학(Geoeconomics) 시대'가 열렸습니다. 세계 10위 무역대국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효율성과 안보 사이에서, 시장과 동맹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본지는 창간 기획 '자유무역의 종언-쪼개진 세상에서 한국의 생존전략' 10회 연재를 통해 변화하는 글로벌 무역 질서를 진단하고, 한국의 생존전략을 모색합니다.

[포인트데일리 송가영 기자] "탄소 배출량이 곧 관세다." 2026년 1월, 이 말이 현실이 된다. 6년간 칼을 갈아온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본격 가동되고, 트럼프의 청정경쟁법(CCA)까지 겹치면서 한국 기업들이 '탄소 샌드위치'에 갇혔다. 철강업계만 10년간 3조원의 폭탄. 포항제철소 굴뚝의 하얀 연기 한 줄기가 곧 한국 경제의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 60년 자유무역 시대, 막이 내린다.

 

 

철강 공장의 외관 모습. 사진=픽사베이

◇"친환경 가면 쓴 신보호주의"... 철강업계 비상= "CBAM이 본격 시행되면 우리 제품 경쟁력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어요. 탄소 배출량 계산부터 인증서 구매까지, 모든 게 비용입니다." 전기로를 운영하는 국내 한 대형 철강회사 김모 부장의 말이다.

CBAM의 핵심은 '탄소 인증서' 강제 구매다. 수입업자가 제품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배출량만큼 CBAM 인증서를 의무 구매해야 한다. 인증서 가격은 EU 배출권 거래제(ETS) 가격과 연동돼 변동성이 크다.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 △수소 등 6개 품목이 우선 적용되지만, 향후 유기화학물·플라스틱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더 가혹한 것은 EU가 2034년까지 무상할당을 전면 폐지한다는 점이다. 현재 EU 역내 기업들이 받던 '면죄부'가 사라지면서 탄소 비용 부담이 급증할 전망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추산에 따르면 2026년 한국 철강업계 CBAM 비용은 851억원에서 시작해 2034년부터 연간 5500억원 이상으로 급증, 10년 누적 부담이 3조원을 넘어선다. 철강 산업의 전방연쇄효과는 1.52로 전 산업 평균(1.0)을 크게 웃돈다. 비금속광물, 전기장비, 운송장비, 건설업 등 연관 산업까지 타격이 불가피하다.

 

 

EU가 자국 경쟁력을 강화하고 탄소 누출 등 환경 보호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내년 1월 본격 시행한다. 사진=연합뉴스

◇미국 청정경쟁법까지... "이중 규제 샌드위치"= CCA는 CBAM보다 더 빠르고 가혹하다. 올해 1월부터 시행된 CCA는 온실가스 톤당 55달러 고정 부과에 매년 물가상승률 '+5%' 인상으로 2030년엔 90달러에 육박할 전망이다. 적용 범위도 2027년부터 자동차·전자제품까지 확대돼 삼성전자, 현대차 등 주력 수출기업이 직격탄을 맞는다.

더 큰 문제는 '국가 평균 탄소집약도' 적용이다. 한국의 평균 탄소집약도(0.22)는 미국(0.18)보다 1.2배 높아, 개별 기업이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CCA까지 고려하면 석유·화학업계는 10년간 2조 7천억원의 추가 비용이 예상된다.

삼일PwC ESG플랫폼 관계자는 "EU와 미국의 환경 규제가 동시 강화되면서 기업들이 양쪽에서 압박받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화학 산업도 위기... Scope 3가 새로운 복병= 화학 산업은 유기화학물·플라스틱의 CBAM 확대 가능성과 함께 'Scope 3(기타 간접배출)' 관리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금호석유화학의 경우 직접·간접 배출량(Scope 1&2)은 감축했지만 Scope 3는 오히려 증가했다. 향후 규제 확대 시 추가 부담이 불가피하다.

주요 기업들은 선제 대응에 나섰다. 롯데케미칼은 수소에너지·전지소재·바이오플라스틱 등 '그린 사업' 육성을, 한화솔루션은 탄소포집활용(CCU) 기술 적용을, LG화학은 2050년 탄소중립 목표로 바이오 오일 공장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포스코는 기후변화를 '제2의 창업' 기회로 봤다. 핵심은 석탄 대신 수소로 철광석을 환원하는 '수소환원제철(HyREX)' 기술이다. 2030년 상용화를 목표로 단기적으론 광양제철소에 탄소 75% 감축 전기로 공장을 신설 중이다. 2024년부터 '내부탄소가격제'를 도입해 투자 의사결정에 반영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Hy-Cube' 전략으로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고로와 전기로를 결합한 '복합 프로세스'로 탄소 20~40% 저감 제품을 생산하고, 'HyECOsteel' 브랜드로 저탄소 제품을 출시했다.

프랑스의 한 마트 내 채소 진열대 모습. 사진=연합뉴스

◇농업과 밥상까지... 보이지 않는 탄소세 전이= 그린보호주의는 밥상 물가까지 위협한다. 비료 원료인 암모니아·요소가 CBAM 대상이어서 비료 가격 상승→농가 생산비 증가→농산물 가격 상승의 연쇄 반응이 우려된다. 한국은 비료 원료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다.

실제 기후 위기가 식량 공급망을 흔들고 있다. 전 세계 온실가스의 26~34%가 농식품 산업에서 배출된다. 유럽의 폭염·가뭄으로 독일·프랑스·벨기에 등의 토양 수분이 급감했고, 미국 곡물벨트 옥수수 생산량은 40% 감소 전망이다. 지난해 미국 서부 채소가격은 80% 폭등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기후변화로 인한 농업 타격이 식량안보 위기로 이어지면서 각국이 자국 우선주의로 돌아서고 있다"고 분석했다.

WTO는 탄소 관세 앞에서 무력하다. EU·미국의 일방적 탄소 관세는 '내국민대우'·'최혜국대우'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지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이해대립으로 WTO 차원의 대응은 난항을 겪고 있다. '무역 규범'이 '기후 규범'에 종속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OECD 32개국 중 29위로 최하위권이다. 3대 곡물(옥수수·밀·대두) 수입 의존도가 96~99%에 달해 자급률은 19.5%에 불과하다. 일본(27.6%), 중국(92.2%)과 비교해도 현저히 낮다. 2022년 식량안보지수는 39위로 일본(6위), 중국(25위)에 크게 뒤진다.

강원도 최전방 화천지역에서 가을걷이가 시작됐다. 사진=연합뉴스

◇해법은 있다: 임야 개발과 스마트팜= 전문가들은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산림을 활용한 임야 개발을 제시한다. 김한호 서울대 교수는 "임야 발굴을 통해 기후환경 대응 생산 적지를 지속 발굴하고, 종자 개량 등 R&D도 중장기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우정 전남대 교수는 "단위면적당 생산량 증대를 위해 정부가 토지 확보에 적극 나서야 한다"며 해외의 혼농임업 사례 도입을 제안했다.

기업은 △탄소 데이터 관리 투명성 확보 △저탄소 기술 개발 투자 확대 △재생에너지 전환 가속화에 나서야 한다. 정부는 △산업 전환 재정·세제 지원 강화 △국제 통상 논의 적극 참여 △글로벌 사우스와의 농업 협력 확대를 통한 식량안보 전략 구축이 시급하다.

그린보호주의는 한국 경제에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기업의 선제적 기술 혁신과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이 절실하다.